꿀벌로 산 지난 일 년

- 힘든데 힘들지 않은 요즘

by 캐리소

딸아,


오늘은 우리 딸에게 참 중요하고 떨리는 날이지.

시부모님 되실 분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두근두근 긴장하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을 네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너는 너의 일상을 성실하게 꾸려가고 엄마는 또 엄마의 일상을 잘 살아내는 중이니

우리는 진짜 어쩔 수 없는 '성실 모녀'인가 보다.


아침저녁으로는 부드러운 바람이, 한낮에는 겉옷을 벗게 하는 계절이야.

이제 진짜 봄이더라.

어르신 집 베란다에는 영산홍이 꽃을 방긋 피우고 이래도 안 볼래? 하면서 엄마를 유혹해.

그러면 빙그르르 나가서 한번 봐주지. 카랑코에도 귀여운 얼굴을 빼꼼 열었더라고.

이 아이들 얼굴 보는 게 즐거움이야.


그 아이들도 봄엔 봄의 일을 하고 여름에는 여름의 일을.

가을과 겨울에도 할 일을 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계절의 숙제를 잘해나가고 있어.


엄마의 하루를 알지?

하루도 동동거리지 않은 적이 없잖아.

하지만 지난 일 년 동안이 그 이전의 몇 년 보다 더 밀도 있었다면 너는 깜짝 놀라겠지?


엄마가 일을 끝내고 얼른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앉는 곳은 식탁도 소파도 아닌 책상 앞이야.

이곳이 엄마에겐 식탁이고 소파거든.

책상에서 엄만 추운 겨울을 예비하는 꿀을 모으고 정신의 휴식을 취하기도 하니까.

책상 앞에선 쌓아 올려야 할 글의 뼈대와, 입체적으로 구현해 내야 할 그림의 구도들이 톱니바퀴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


하지만 결기 있게 달려들었던 마음과는 달리 결과물은 늘 별로란다.

문장들은 어설프고, 머릿속에서는 더없이 멋진 작품이었는데 캔버스에 옮기면 보잘것없이 시들어 버리는 그림 앞에서 실망스런 마음 한가득이다.

마음에 드는 순간보다 엉망인 결과물을 마주하는 일이 훨씬 많아.

아직 완결된 결과를 바랄 없지만 잘 안되고 실패할 때는 힘이 빠지거든.


그런데 참 이상하지?

분명 김이 다 새 버리고 더 끌어올릴 힘도 없는데 내 안의 동력은 멈출 줄을 모르는구나.


엄마를 만난 사람들은 '힘들어서 어떡해!'라고 하지만 딸아, 너는 이해할 수 있겠니?

몸은 해야 할 일들에 매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고단한데 역설적이게도 전혀 힘들지 않다는 사실 말이야.

겉모습은 지쳐 보여도, 내 영혼의 계기판은 언제나 만땅으로 채워진 기름 같단다.


쓰고 그리는 행위가 이미 엄마를 태우는 연료이자, 살게 하는 목적이기 때문이겠지.

결과가 엉망이면 좀 어때. 영혼이 이토록 생생하니 언젠가는 영혼도 손뼉 칠만한 결과물이 나올 거야.





엄마의 일 년을 돌이켜보면 꿀벌처럼 살았다고 할 수 있단다.

일 년 동안 엄마의 꿀을 모았거든.

삐뚤빼뚤이지만 글이 쌓였고, 초보지만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어.

나중에 모아놓은 이 꿀은 엄마와 너희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양식이 될 거라고 믿으며 부지런히 붕붕거려 본다.


벌이 꽃을 찾아 날아들 듯 봄이 엄마를 간질이지만 유혹받지 않아.

엄마도, 벌도 꿀을 모으느라 계절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거든.


벌도 자신의 일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순간순간 힘겨운 일을 수행해 내지만 그 일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잖아.

자신에게 장착된 모든 힘을 십분 발휘해서 가치 있는 행위를 해나갈 뿐이야.


앞에서 너와 나를 '성실모녀'라고 한 것 말이야,

엄마는 다른 능력도 재주도 없으니 그냥 성실 하나로 밀고 나가는 거야.

이렇게 명명해 버리면 꼼짝없이 그렇게 살아야 하니까.


딸,

시어머니는 잘 뵙고 왔다며.

어른들이 싹싹하고 애교 많은 너를 예뻐해 주셨다지.

일 앞에서 부지런한 너는 네게 오는 어떤 기회든 아름답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지금 이 순간, 네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행복하게 하고야 말았을 네가 자랑스럽다.


그럼 또다시 꿀 모으러 고고~!!!



우리는 이제 질좋은 월동용 기름을 태우듯 별처럼 순수한 불길로 타오른다.

- 소로의 일기- 전성기편, p. 288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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