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가 알았던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었다

변명과 항변

by 봄날


봄날 새벽, 운동 장소에 너무 일찍 도착한 덕분에 일행을 기다리면서 브런치 글을 읽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데 우연인지, 아니면 아직도 흔한 일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브런치에서 워킹맘들의 고부 갈등에 관한 글을 많이 읽게 된다.


글을 읽다 보면 제삼자인 내가 읽어도 같은 어른으로서 너무 부끄러울 때가 많다. 물론 어떤 사실 관계에 대한 평가는 두 사람 모두의 말을 잘 들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강자의 변명은 대부분 거짓이고, 약자의 항변은 대부분 진실이다”라는 명진 스님의 말씀 때문이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주변 여성 관객들의 흐느낌 소리가 들리곤 했다. 영화관을 나와서 아내는 내게 소감을 묻고는 직접 경험하지 못해 공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집에 돌아와 아내는 오래된 지난날의 여러 가지 사례들을 끄집어내서 대화를 나누고 나는 또다시 어느새 죄인이 되어있었다. 그중에는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나를 배려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스스로 자존심이 상하고 걱정할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 그날은 미안해서 평소처럼 ‘오블리비아테’라고 주문을 외울 수도 없었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걱정과 관심은 당연하지만 아들이 성인이 되어 스스로 선택한 배우자와의 결혼생활에 개입할 이유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된다. 자식을 어떻게 키웠든 자녀교육의 최종 목표는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기 때문이다.


자식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효도야 고마울 뿐이지만, 효도를 바라는 ‘보상심리’는 자연의 법칙과도 위배되는 것이다. 딱따구리든, 참새든 모든 자연은 새끼들을 목숨 걸고 키우지만 그 새끼들은 스스로 날 수 있을 때만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리고 어미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또다시 자신의 삶에 집중한다.



굳이 효도를 받고 싶다면 며느리에게 요구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키운 아들에게 직접 요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럼 왜, 시아버지와의 갈등은 찾아보기 힘들까. 만약, 고부갈등의 원인이 시어머니라면 사회화가 덜 되어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쏟아내고 남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솔직하고 뒤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고부갈등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누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른으로서 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 없다는 것이다. 나이는 노력해서 먹는 것이 아니니 어른이라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존중받을 일도 아닌 것이다. 어른에 대한 존경은 어른이 어른 다울 때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고, 존중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가끔은 가려서 해야 된다.


가평


또한, 내 경험으로는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 그런 것은 없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냥 버리면 될 일이지만 가족이기에 그럴 수도 없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너진 자존감에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울고 싶을 땐 참는 게 쿨한 게 아니고, 우는 게 쿨한 거다. 한 가지 희망은 잘 버텨내면, 머지않아 고개를 들 날이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