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ader
책 읽어 주는 앱을 다운로드하고 예의 있게 아내가 먼저 잠든 시간에만 들었다. 전자책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장거리 비행 중 깜깜한 밤하늘 위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것만큼의 몰입감이 있고 상상력이 자극되었다. 지난여름에 읽으려고 했지만 폐인이 될 수 있다는 아내의 경고에 따라 책구입을 포기했었던 ‘태백산맥’(전 10권, 조정래)을 벌써 5권째 듣고 있고 계속 듣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그 좌우 이념갈등의 뿌리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냥 궁금해서 읽는다. 지난여름에는 드라마 ’ 나의 해방일지‘(jtbc)와 제목이 유사한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가 쓴 ‘아버지의 해방일지‘(창작과 비평)를 읽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로 시작하는 삼 일간의 아버지 장례식을 따라가다 보면 해방 이후 70년 현대사의 질곡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오죽허면 그랬겠냐, 긍게 사람이제!!”라는 소설 속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도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한 뼘 더 넓혔다.
사회주의는 이미 몰락한 지 오래고, 공산주의는 중국, 러시아의 독재국가와 백두혈통의 북한은 왕조국가로 변신한 지금, 요즘 세대들은 빨치산이 지리산 옆에 있는 작은 산인줄 안다지만 일부 기성세대들은 아직도 그 미망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잠들기 전에 매일 한 시간만 듣겠다는 당초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너무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거시기하지만, 밤새 전남 보성의 벌교 읍내를 헤매고 다니다 그 오디오북의 ‘책 읽어 주는 여자‘와 헤어지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었다.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더 리더(The Reader): 책 읽어 주는 남자‘(2009)가 떠올랐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시공사)를 원작으로 만들었으며, 영화 ‘타이타닉’(1998)에 출연했던 케이트윈슬렛의 명연기와 함께 아카데미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열등감에 기인한 뿌리 깊은 수치심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영화의 주인공 한나 슈미츠(케이트 윈슬렛)가 마이클이 읽어주던 책 이야기를 들으며 울고 웃던 행복한 장면들이 생생하게 그대로 나한테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감추고자 계속되었던 그 영화의 반전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우연히 트위터에서 알게 된 오디오북, 책 읽어주는 앱이지만 ‘선비적 게으름’에 익숙한 내겐 딱 안성맞춤이었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서 협탁에 있는 조명등을 켜고 한 손에 책을 받쳐 들고 읽는 수고로움을 끈기 있게 인내할 근성은 내게 없었다. 인생을 살면서 아내와 연애할 때, 그리고 생계를 위한 회사 일을 빼고는 끈기, 인내, 근성은 나와는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판단력이 빠른 건지, 자존감이 높은 건지 조금만 비합리적이거나 인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포기하는 쪽을 택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아침에 FM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던지, 규칙적으로 브런치에 글을 쓴다든지, 하는 일에서 흥미를 잃거나 재미가 없으면 바로 그만둘 것이다. 이젠 또다시 새로운 목표와 도전, 성취에 집착할 이유나 목적이 없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평생 살아왔던 목표, 실적, 달성 그리고 또 새로운 도전의 쳇바퀴 같은 삶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여행을 하는 것도 어떤 목표나 목적이 없다. 무엇이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한다. 어느 광고에서 배우 류해진이 했던 말처럼, 때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이유나 목적이 없기 때문에 재미없는 것을 계속할 이유 또한 없다.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를 뿐인 것처럼, 그냥 재미있으면 하고, 또 흥미를 잃지 않으면 계속한다. 무료함은 부자의 저주라는데 난 전혀 무료하지 않으니 확실히 부자는 아니다. 남들이 무얼 하는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지금의 삶이 좋다. 진짜인 삶은 그런 거다. 흔들리지 않는 것, 상처받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외롭지 않던가.
“인생 별거 없다”라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쓸데없이 여기저기 남의 인생에 간섭하고, 바람이 불면 납작 엎드리고 햇볕이 나면 고개를 쳐드는 잡초 같은 인생을 살 거면 그냥 조용히 재미있게 생활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보통의 삶이 가장 최고 난도의 인생이다. 죽을 때까지 헛된 욕망을 쫓느라, 보이지 않는 행복을 찾느라 괜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정원을 손질하면 나비가 저절로 찾아오듯, 내 삶을 잘 가꾸면 행복은 제 발로 걸어온다.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나를 찾아가면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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