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광복절 연휴가 지나고 막바지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 ‘덩케르크’(2017)를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오랫동안 기다렸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챙겨보았다. 상영시간이 세 시간 정도라는 후기를 보았기 때문에 원칙에 맞게 가장 더운 오후시간에 프리미엄 상영관인 샤롯데에 예약을 했다. 영화 시작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집을 나섰다.
관람 전 무료 서비스하는 냉커피를 마시며 시원한 영화관 라운지에서 sns도 둘러보고 영화평도 미리 읽어보고 싶었다. 영화 내용은 이미 알려진 대로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와 오펜하이머의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엔 시점을 왔다 갔다 하며 전개되는 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편집 덕분에 상황파악이 늦어졌지만, 분명한 건 그러는 동안에도 자막의 ‘시안화칼륨’은 금방 이해가 되었다. 그것은 강한 맹독성의 청산가리를 말하는 것이다. 시골말로는 싸이나라고 하던 독약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안화칼륨의 앞글자만 딴 일본말이었던 듯했다.
어떻게 된 연유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콩나물을 기르는 노란 콩에 작은 구멍을 뚫고 청산가리 가루를 채우고 파낸 콩가루로 막은 다음 눈 덮인 겨울산에 뿌려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그 반경 이백미터를 넘지 않고 그 콩을 주워 먹고 죽어있는 꿩이나 날짐승들을 사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 만약 이런 추억이 있다면 그 사람의 연식과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시골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회사 다닐 때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극한직업’(ebs)의 세계에 나오는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심리학 용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에서 느끼는 상대적 행복), 힘든 회사생활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소소한 일상의 삶에서 감사함을 잃을 때면 케이블채널을 찾아서 가끔 본다.
사실, 인생에서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시절이 아버지가 운전하고 그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와 나누는 얘기 소리를 들으며 차 뒷좌석에서 졸던 때일 것이다. 옛날 아버지들이 그 편안한 일상의 감사함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해병대캠프에 보낸다고 겁을 주던 상황과 비슷하다. 그리고,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는 내내 다음 두 가지 화두가 떠올라 영화의 세밀한 감상을 방해했다.
그 첫 번째는 누구든 인생에서 가장 잘 나갈 때가 제일 위험할 때란 말이다.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높은 나무 위에 올려지는 것과 같다. 이제 그 위상과 명성에 걸맞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쉽게 존재이전이 되질 못하니 스스로 그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처럼 오펜하이머 역시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말했고, 그 엄청난 프로젝트의 성취 때문에 이른 나이에 죽을 때까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파시스트의 히틀러, 공산주의의 스탈린, 제국주의의 일본에 한 발 앞서 원자폭탄을 만들고 자유민주진영을 구원했다고 하지만, 그는 세상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핵폭탄의 최초개발자로서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처럼 인간적인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 당시 타임지 표지까지 장식하면서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쥐고 제일 잘 나가는 물리학자가 되었지만 그 역시도 세상의 시기와 질투를 피해 갈 순 없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인생에는 늘 배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와 르노와르, 고흐의 그림을 거실에 걸어둘 정도로 부유했고, 7개 국어에 능통한 천재이면서도 품격과 인품을 고루 갖추었지만, 그의 인생에서도 주변사람들의 오해와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래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실제 그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면서 그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가장 가까운 주변인물들의 배신과 함께 반공이라는 이름의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리고 만다.
정보기관이 암시되며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의 애인이자 약혼녀, 그리고 그의 아내와 동생이 공산주의자였기에 그의 국가 경력과 무관하게 소련의 스파이 혐의로 의심받고 공산세력으로 몰린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주변의 가까운 사람,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는 매우 흔한 일이다. 오죽하면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중에서 “잘못된 친구의 배신을 인내하는 것”이 성공의 하나라고 말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