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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Apr 08. 2024

9. 하... 공무원은 직접 청소를 한다.

#박 주사 이야기9




"자자 청소합시다!"


국민신문고에 올라온 민원에 이전에 다른 민원에 작성했던 답변을 복사해서 붙여 넣기를 하려던 찰나, 1 팀장님이 일어나며 들으란 듯 큰 소리로 말한다.


'쯧. 일도 많아 죽겠는데 뭔 놈에 청소까지 해야 돼? 제기랄. 초근(초과근무) 각이네. 야근수당도 없는데 초근까지 해야 하다니. 이 좋은 금요일날 망할 무료봉사라니.'

열받은 내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나는 눈앞에 보이는 타자기를 들어 쿵 소리와 함께 모니터 아래로 집어넣는다. 아직 붙여 넣어지지 못해 민망해하고 있는 신문고 답변의 하얀 화면 위 커서가 반짝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 보이는 시계는 어느덧 17:32분을 가리키고 있다.


'1 팀장님은 일이 그렇게 없나. 맨날 청소시간만 되면 잊지도 않고 저리 소리치시네.'

나는 1 팀장님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눈을 흘긴다. 내 시선이 1 팀장을 지나 과장님의 자리로 향한다. 없다. 당연히 없다. 어떻게 된 게 청소시간만 되면 과장님은 귀신같이 알고 자리를 비운다. 나도 나중에 짬이 차서 5급 과장이 되면 청소시간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미쳤군. 저 나이 되도록 공무원할 생각을 하다니. 그러다 제 명에 못살지 못살아.'

 나는 순간 떠오른 끔찍한 생각을 지우겠다는 듯 모니터 화면을 꺼버린다. 그리고는 익숙한 걸음으로 쓰레기통과 분리수거통이 있는 수납장 앞에 서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다.


"윽."

쓰레기 수납함 문을 여니 쓰레기 비닐 주변으로 엉망진창으로 쌓여있던 쓰레기들이 문 밖으로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그 옆 분리수거함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다 먹지 않은 커피가 담겨있는 플라스틱 컵들도 질세라 쏟아져 나온다. 내 슬리퍼 앞에 미처 피하지 못한 내 양말에 커피가 묻는다. 이제 내 발에선 커피 냄새가 날 것이란 생각에 기분이 묘해진다. 제기랄. 썩은 커피 냄새만큼 지독한 게 또 있을까. 그것도 이렇게 치우는 사람 따로 있고, 버리는 사람 따로 있는 이따위 썩은 마인드로 가득한 이 사무실에서 묻은 썩은 커피라니.


'아니, 자기들이 안 치울 거면 쓰레기라도 제대로 비닐 속에 넣던가. 하. 면직(퇴사) 마렵다! 제기랄!'

나는 다시 한번 울화통이 치솟아 오른다. 당장이라도 이 엉망이 된 쓰레기 비닐을 통째로 들어 이따위로 커피를 남기고 플라스틱 컵째 버린 게 분명한 고 주사를 비롯한 몇몇의 머리 위에 내동댕이쳐버리고 싶다.

하지만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가. 특히 직장생활에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걸 습득해 버린 습관은 얼마나 저주스러운지, 내 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런 내 울화통을 잘만 감춘 채 주변 더러운 쓰레기들을 집어 비닐에 샤샤샥 집어넣는다. 대단하기도 하지. 제기랄.


그렇게 쓰레기를 정리하고는 위쪽 수납장에서 새 비닐을 꺼내 쓰레기통에 씌어 쓰레기통을 수납함에 다시 넣는다. 그리고 새 비닐을 하나 더 꺼내 들고는 뒤돌아 문서 세단기로 향한다.


'이 망할 건 또 종이 걸려있네. 아니, 종이가 걸렸으면 해결을 해놓고 가야 할 거 아냐? 그냥 걸리면 나몰라라 하면 그만인가? 망할 것들'

종이가 갈리는 절단면에 두꺼운 종이가 낑겨있다. 예전에는 이렇게 종이가 끼여있으면 삑삑 거리면서 소리라도 나서 민망함을 마구 쏴주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마저도 고장 났는지 종이가 걸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세단기. 과 서무 주사한테 이 망할 세단기 고장 났다고 한지가 언젠데, 예산이 없다는 둥, 비싼 사무용품은 자산으로 등록해야 돼서 회계과 승인이 필요하다는 둥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만 쏟아낸다. 뭐가 됐든 업무에 지장이 있으면 돈 들여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바꿔달라는 내가 이상한 건가?


나는 옆에 있는 큰 가위를 세단기 절단면에 집어넣고 힘줘 끼여있는 종이를 박박 긁어 아작을 낸 후 다시 기계를 작동시킨다. 세단기가 안 돌아간다. 아주 단단히 끼었나 보다. 나는 다시 힘줘서 세단기를 박살이라도 내겠다는 심정으로 가위로 절단면을 박박 긁어낸다. 이제 됐겠지. 다시 기계를 작동시켜 본다. 지잉- 꾸역꾸역 자기 좀 이제 그만 보내달라는 소리를 간신히 토해내며 세단기 아래 갈린 종이함으로 종이들이 휘날린다. 갈린 종이를 자세히 보니 호치깨쓰 심이 여러 개 박혀있다. 망할. 호치깨스 심 좀 빼고 세단기에 종이를 갈라고 세단기 절단면 입구에 쪽지까지 붙여뒀건만 그딴 쪽지 너나 보라는 듯 보기 좋게 찢겨있다. 망할 것들. 이러면서 이 쪽지에 호치깨스를 왜 호치깨스로 썼냐고 비웃기나 하지. 누가 요즘 세상에 스테플러를 호치깨스라고 하냐고? 나! 내가 호치깨스라고 한다 이 망할 것들아. 그 호치깨스 심 좀 제발 찢어내고 종이 좀 갈라고.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다.


'도대체 이 망할 놈에 공무원 놈들은 사고 치는 놈 따로, 처리하는 놈 따로 있는 건지. 개빡치네.'

하지만 이번에도 습관에 절여진 나는 아까 수납장에서 꺼내온 커다란 비닐봉지를 열어 갈린 종이를 쑤셔 넣는다. 하얀 먼지가 휘날린다. 제기랄. 이러다 제 명에 못 죽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혼자 낑낑대면 누구라도 와서 도와줄 법한데, 저 청소하는 '척' 손걸레 들고 창틀이나 닦고 있는 것들은 도와줄 생각이 없나 보다. 아니 창틀에 먼지를 누가 관심 있다고 저렇게 일개미들처럼 창틀만 하하 호호 웃어대면서 닦아대는지 모르겠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냥 빨리 하고 잊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사님, 같이 하시죠. 여기 제가 잡을게요. 거기서 그냥 부으시면 될 것 같아요."

낯선 목소리가 뒤통수 너머로 들려와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곤색 정장 어깨가 각진 라인을 따라 착 흘러내리며 반짝이는 재킷을 입은 주 주사가 언제 왔는지 다가서 내가 들고 있던 비닐을 대신 들어준다. 공직생활 3년여 만에 처음 느껴보는 같은 공무원의 도움에 얼떨떨하다.


"어... 어..... 아..."

낯선 도움에 어버버 하고 있는 새에 주 주사가 순식간에 세단기의 종이를 정리해 비닐을 꽉 묶어버린다. 확실히 사기업 직장 생활을 오래 하고 와서인지 그동안 내가 욕만 해대던 공무원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왜인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나를 향해 주 주사가 고개를 꾸벅하더니, 원래 자신이 하고 있던 거대한 공업용 청소기로 다시 가 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주 주사의 뒷모습 정장 재킷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사기업 사람들은 다들 저렇게 멋지겠지? 청소할 때까지 저렇게 친절하고 멋지다니. 역시 썩어빠진 이 공무원 조직과는 비교도 안된다. 하루빨리 여길 떠야지. 제기랄.


아까비운 쓰레기 비닐과 끈적끈적한 커피 플라스틱 컵으로 가득한 플라스틱 비닐, 그리고 세단기의 갈린 종이 비닐까지, 마치 산타할아버지처럼 커다란 비닐 세 개를 어깨에 들쳐 맨 나는 구석 한편에 나처럼 버려진 듯한 초록색 수레 카트 위에 내려놓는다. 평소처럼 수레를 끌고 청사 건물 밖에 있는 분리수거장에 가기 위해 수레를 끌기 시작한다. 바퀴가 덜컹거리며 잘 굴러가지 않는다.


'하, 저것들 또 수레 바꿔갔네.'

나는 우리 과 사무실 맞은편에 위치한 옆 과를 째려본다. 우리 과 서무 주사를 그렇게 닦달해서 다 부서져가던 수레를 새 수레로 겨우 바꿨는데, 저 옆과 놈들은 툭하면 구려 터진 지들 수레와 우리 과 새 수레를 바꿔간다. 도대체가 이 팀이고 저 팀이고, 하나부터 열까지 망할 공무원 것들은 맘에 드는 구석이 없다.


"박 주사님!! 같이 가요!!"

금방이라도 고장 날 것처럼 덜커덩 거리는 카트와 끙끙 씨름하고 있는 내 뒤통수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의 곤색 반짝이는 정장을 휘날리며 주 주사가 내게 달려오고 있다.


"와... 개 멋있네. 저 사람은 지치지도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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