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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현 Mar 11. 2024

7. 70살 막내

#박 주사 이야기7




"저기... 박 주사님..."

낯선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휴대폰 옆 스위치를 눌러 화면을 감춘다. 고개를 돌려보니 노랑 형광 조끼를 입은 노인이 서서 나를 부르고 있다. 누군가 가만 보니 상반기 시니어 일자리 기간제 근로자로 일해주셨던 어르신이다. 나이가 70세임에도 당시 뽑혔던 어르신들 중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막내로 불리던 분.

70세에 막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기억.


당시 시니어 기간제 채용 담당자였던 나는 제발 65세 노인이 많이 지원하길, 제발 70세 미만 노인분들만 지원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 70세 어르신이 지원자 중 가장 나이가 적었다. 60대는커녕, 70대분들이 대다수였고, 80대분들도 두 분이나 있었다. 아무리 시니어 일자리 채용 공고였다고 해도, 일을 하기는커녕, 혹시 일하다가 쓰러지시지나 않을까 하는 분들까지 지원하실 줄은 몰랐다.

초고령화 시대가 실감 났다. 60대가 이렇게 귀할 줄이야, 70세가 막내로 일하게 되는 세상이라니.

이제 맞는 세상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쨌든 이 예산은 어르신 일자리를 위해 쓰여야만 하는 돈이었기에 만 65세 이상만 지원 가능했다. 더 젊은 인력을 뽑으래야 뽑을 수 없는 예산.


뭐, 내 생각에는 나이 제한을 낮춘다고 해도 젊은 사람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런 단기 기간제, 그것도 추운 겨울 눈 맞고, 더운 여름 뙤약볕에 때려 맞으며 해야 하는 일을 할리가 만무했다. 그런 자리는 간신히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대신하고 있는 게 이 나라의 현실 아니던가.

다시 한번 까맣게 변해버린 휴대폰 액정에 떠있을 '이민'에 대한 정보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아,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70살에 막내든 말든, 나랑은 별로 관련이 없는 일이니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용무를 묻는다.


"아, 주사님... 다름이 아니고... 공용차 주유를 좀 해야 해서 전표 좀 받으러..."

어르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내 자리 오른쪽 서랍장 제일 위 서랍에서 노란 전표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는다. 내심 하반기 시니어 일자리 정보를 물어보려고 오셨나 하는 의심이 들었던 나는 마음속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안타깝게도 하반기에는 채용 예정이 아직 없다. 그리고 없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안타깝게도 시니어 일자리를 위한 예산이 아직 책정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다. 물론 '아직'이긴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를 일에 대해 아무런 답을 해줄 수 없는 입장은 참 고달프다.


"주 주사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도장받으셨죠? 갖고 오세요."

나는 작업을 하기 전 내 맞은편에 멍 때리고 앉아있는 주 주사를 부른다. 주유 전표를 끊어주는 업무는 막내가 하는 게 당연하므로, 오늘 온 막내인 주 주사에게 업무를 넘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부터 좀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귀찮고 번잡한 건 빨리빨리 넘겨버려야지.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아니, 이 망할 공무원 책상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싫다.


"주 주사님, 여기는 저희 상반기에 일 봐주신 기간제 분이세요. 하반기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주유 전표 끊는 건 앞으로도 주 주사님이 하게 되실 거라 그냥 인계해 드릴게요. 그냥 보시고 똑같이 하시면 돼요."

내가 노인 옆에 나란히 선 주 주사를 향해 말한다. 여전히 내 목소리는 무관심하다.


"아, 안녕하세요 어르신. 제가 오늘 처음 와서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주 주사가 특유의 밝은 미소를 얼굴에 지으며 말을 건넨다. 오늘 처음 봤지만, 역시나 저 넉살이 참 부럽다. 사기업에서 오래 일하면 저렇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능숙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분명하다.


"아, 아닙니다... 주사님.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허허."

상반기 동안 몇 번 보진 못하긴 했지만 나한테는 저렇게 사람 좋은 웃음을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노인이 처음 보는 주 주사에게는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괜히 언짢다.


"얼마나 필요하세요?"

나는 노인에게 무심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 예... 10리터 찍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반장님이..."

나는 책상 위 아무렇게나 올려진 노란 전표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10L 숫자를 적는다. 노란 전표 한 장에는 접히는 부분 기준 좌우로 똑같은 내용이 기재된다. 차량 번호, 필요한 기름양, 등유/경유/휘발유 종류, 그리고 고내 내서명. 나는 제일 아래 내 이름을 대충 휘갈겨 적고 내 도장을 꺼내 10L 숫자와 내 이름 글자, 그리고 종이가 접히는 부분에 세 번 탁탁탁 찍는다. 도장에 인주가 말랐는지 노란 종이 위에 희미하게 찍히지만 그냥 두기로 한다.


"주 주사님 여기 주사님 사인하시고, 이렇게 도장 세 번 찍으시면 돼요. 그다음은 반 접어서 찢으신 다음... 어르신, 여기요!"

나는 종이를 반으로 접어 대충 찢어, 찢긴 종이 한쪽을 귀찮다는 듯 노인에게 건넨다.


"아... 네... 감사합니다 주사님... 그런데... 혹시 저 하반기에도 일이 좀 있을..."

종이를 건네받은 노인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글쎄요. 모르겠네요.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요. 공고 나면 홈페이지 올라갈 거니까 거기서 확인해 보세요."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럼 그렇지, 왜 안 물어보나 싶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주사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 주사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노인이 인사를 건네고는 어기적어기적 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나선다. 노인 옆에 서있던 주 주사가 노인을 따라가더니 문을 열어드리고 엘리베이터를 잡아 배웅해 드리는 게 보인다.

꼴사납다.

저렇게까지 친절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우리는 돈 주고, 저분은 돈 받고 일할 뿐인데.

마음이 괜히 불편하다.

오늘 하루 동안 가만 보니 주 주사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주사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배웅하고 돌아온 주 주사를 불러 내 옆에 세운다.


"노란 전표랑 이거 주사님 도장 챙겨가시고요. 전표는 모아놓으셨다가 매달 거래 주유소랑 정산해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냐면요..."

나는 검은색 실로 단단하게 묶여있는 파란색 판판한 표지의 정산 종이 묶음을 주 주사에게 건네며 정산 방법을 한참 설명한다. 주 주사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봐야 하는 생각이 잠시 들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한다.


'이해 못 하면 결국 지 손해지 뭐, 나는 알려줬으니 내가 할 건 다 한 거고. 이렇게까지 해주는 공무원도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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