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주사 이야기5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카페 앞 주문대에 선 팀장이 카페 직원에게 말한다. 이 더위에 뭔 놈에 뜨거운 커피를 시키시나 싶다가도 역시 건강 때문에 그러신가 싶다. 그럼 커피를 안 드시는 게 맞지 않을까.
"아, 저는 카라멜 마끼아또요!"
고 주사가 팀장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주문을 잇는다. 평소 소금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짠순이인걸 잘 아는 나는 고 주사가 재빨리 팀장이 쏘는지 눈치를 봤다는 걸 잘 안다. 고 주사가 월요일에 산 아메리카노를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수요일 저녁까지 계속 물 타먹는 걸 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빨대도 3일 내내 바꾸질 않고 계속 같은 걸 쓰던 모습이 아주 충격적이었다.
짬순으로 하면 다음 주문 차례가 나이지만 섣불리 뭘 주문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맞다. 나는 커피를 못먹는다. 아니 먹기 싫다. 한약처럼 쓰기만 한 커피를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마시는지 모르겠다. 공무원 세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동기 중 하나가 공시 준비하는 동안 커피 한잔 안 먹고 준비했냐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 나한테 독하다고 했다. 커피를 안 마시는 거랑 독한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커피를 안 마셔서 딱히 불편한 점은 없다. 아니 없었다. 지금처럼 카페에서 짬순으로 차례차례 빨리빨리 주문을 강요받는 때만 아니면. 커피를 안 먹는 나 같은 사람은 카페에 오면 뭘 주문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핫초코만 주문했는데, 그랬더니 사람들이 초딩이냐고 놀리듯이 말하길래 다른 걸 찾아야 했다. 대학 때는 그런 주변의 시선을 쿨하게 무시했다. 남들의 눈치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걸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덕분에 보기 좋게 아싸(아웃사이더)가 되었지만, 그게 뭐 어떤가? 나를 아싸 취급하면, 나도 그들을 아싸 취급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공무원이 되고 그 믿음은 날 괴롭혔다. 그들의 조직에 같은 색으로 녹아들지 못하면 언제나 구설수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나는 전혀 원하지 않았건만, 공무원이라는 탁한 회색의 조직에 갇혀있는 그들 모두는 그들처럼 탁해지지 않으려는 나를 답답해했다.
"아, 제가 먼저 고를까요? 음... 사장님 여기 뭐가 맛있어요?"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내 옆에 서있던 주 주사가 갑자기 앞에 카페 직원에게 말을 꺼낸다. 나는 내 주문 차례 순서를 뺏긴 것 같아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메뉴를 고민할 시간이 생긴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내 고민을 아는 건지 아니면 그냥 떠들어대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 건지 주 주사가 넉살 좋게 카페 직원과 대화를 이어간다. 덕분에 메뉴를 끝까지 살펴볼 수 있었던 나는 자몽에이드를 고르고 주문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는다.
"아, 정말 친절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음... 저는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할게요."
주문 준비를 마친 나를 알아챈 건지 주 주사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아메리카노 먹을 거면 그냥 주문하면 될 걸 왜 저렇게 떠들어댄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는 자몽에이드로 할게요."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주문을 마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카라멜 마끼아또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자몽에이드 하나. 총 네 잔 맞으시죠? 이쪽에서 계산해 드릴게요."
주 주사와 한창 떠들어 대던 카페 직원이 말한다. 평소라면 내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팀비 봉투를 꺼내 계산했겠지만, 아까 주 주사에게 넘긴 게 신의 한 수였다.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봉투에서 동전 따위를 꺼낼 필요가 없어진 나는 주 주사가 알아서 계산을 하든 말든 앉을 테이블을 향해 뒤돌아 걸음을 옮긴다.
"커피는 내가 사지."
뒤통수로 낯선 말을 하는 팀장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뭐?'
나는 팀장의 그 말에 놀라 잠시 걸음을 멈춘다. 평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잘 먹지 않는 책임관과 고 주사를 대신해 유일하게 팀장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어줬던 게 바로 난데, 그런 나한테는 지금까지 카페 한번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없었는데. 뭐 하나 사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주 주사에게는 온 첫날부터 커피를 쏜다고 하는지 팀장이 밉다. 나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고는 비어있는 테이블을 향해 간신히 발걸음을 뗀다.
털썩 자리에 앉은 내 앞에 팀장이 앉는다. 그리고 다행히도 고 주사가 이번에는 팀장 옆에 앉는다. 그 짧은 순간에 제발 내 옆에 오지 말라고, 내 옆에 앉지 말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주 주사는 아직 계산대 앞을 서성이고 있다. 아마도 주문한 음료가 나오면 갖고 오려고 대기하고 있는 것 같다.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유난스럽네.'
사기업을 오래 다녔다 와서인지 사회생활 만렙을 찍은 듯한 주 주사의 모습이 괜히 눈꼴 셔 꼴 보기가 싫어진다. 어쩌면 내게 없는 사회성을 그에게서 봐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첫 사회생활이 이 망할 공무원이 아니라, 저 주 주사처럼 사기업이었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나도 주 주사처럼 사회성 만렙을 찍고도 남았을 텐데.'
시원한 카페에 앉아있는데도 왜인지 열불이 난다.
곧이어 주 주사가 쟁반에 받친 음료를 들고 와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려준다. 누가 보면 이 카페 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능숙한 손놀림으로 먹기 좋은 위치에 내려놓는다.
"응? 주 주사 고마워! 근데 이건 뭐야? 빨대에 비닐이 남아있네."
팀장은 연신 주 주사에게 고맙다고 해댄다. 뭐가 그렇게 고마운지 모르겠다. 팀장이 가리킨 빨대를 보니 음료들에 꽂혀있는 빨대 윗부분에 투명한 빨대 껍질이 붙어있다. 빨대를 왜 뜯다 말았는지 궁금해지는 찰나,
"아~우리 팀장님 왜 이러실까? 빨대 입에 닿는 부분이 더러워질까 봐 요기만 남겨놓으신 거잖아요. 우리 주 주사님 섬세하신 것 좀 봐~ 센스쟁이시네, 정말!"
고 주사의 알 수 없는 코 멩멩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주 주사는 당황스러운지 얼굴이 불그스름해져 있다. 굳이 이런 데서 왜 센스를 발휘하는지 모르겠다. 센스쟁이 주 주사가 싫고, 그걸 굳이 입으로 설명해 대는 고 주사는 더 싫다. 나는 빨대 위에 매달려 있는 비닐을 보란 듯 거칠게 뜯어내 버린다. 그대로 빨대를 통째로 빨아드릴 기세로 자몽에이드를 빨아버린다. 시원한 에이드를 먹으니 그나마 답답했던 속이 좀 풀리는 것 같다.
"근데 주 주사님~ 그 반지는 뭐예요? 에이~ 결혼반지죠 그거?"
"아기는요?"
"집은 근처세요?"
"출퇴근은 어떻게 하세요? 차는 있으세요? 여기 주차장에 직원이 차 대는 거 댓수 제한 있어서 제가 서무 주사님한테 여쭤봐 드릴게요~! 호호!"
언프리티 랩스타였나? 망할 고 주사가 요즘 그거 본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더니만, 거의 속사포 랩 수준으로 주 주사를 향해 질문을 쏟아낸다. 내 기준에는 극히 개인적인 질문들인데, 어쩜 저렇게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저렇게 물어봐댈까. 기가 막힌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그런 무례한 고 주사의 질문에 주 주사가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을 착착 잘만 해낸다는 거다.
"결혼반지예요. 비싼 건 아니고요. 하하."
"아기는 아직인데, 이제 슬슬 가져볼까 하고 있고요."
"집은 차로 10분 정도 걸리더라고요. 다행히도."
"차는 전 직장 퇴직금 좀 써서 신형으로 뽑았어요. 아내 덕이죠 뭐."
"아, 직원이면 다 댈 수 있는 게 아니군요? 알아봐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정 안되면 다른 방법 찾아보면 되니 너무 무리하진 마시구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고 주사님."
고 주사의 쏴대는 질문에 대답을 맛깔나게 해내고 있는 주 주사를 나도 모르게 감탄 어린 시선으로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 괜히 주 주사가 입은 정장이 더 빛나보이는 것 같다. 공무원이 아닌 회사원들은 다들 저렇게 말을 잘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근데 전 직장은 왜 그만두셨어요? 그 나이에 9급으로 들어오시면 월급도 엄청 적어지실 텐데 굳이?"
"쿨럭. 쿨럭."
하마터면 빨대로 힘껏 빨아올려져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던 자몽에이드가 고 주사의 얼굴로 발사될 뻔했다. 아니, 저런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정말 저 고 주사는 미친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든다. 첫 출근해 초면인 사람에게 저런 질문은 좀 아니지 않나 싶다. 그냥 7급인 자기보다 낮은 9급 따위라서 하대하는 게 당연한 인성인 건가.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내가 한 질문도 아닌데 괜히 주 주사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주 주사는 이번 고 주사의 질문에는 이전과 달리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당황한 건 같진 않은데,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인달까? 어떤 대답을 하는 게 좋을지 속으로 고민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내 할 말을 찾아냈는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을 시작한다.
"안정적이잖아요. 잘리지 않고. 그 정도면 저는 좋겠더라고요. 아니, 그 정도만 해줘도 말이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데 말이죠. 그리고, 저도..."
주 주사의 대답에 왜 공무원이 됐냐는 질문에 기대했던 것보다 뻔한 답이 돌아와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이 든다.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주 주사는 왜인지 짧은 답을 남기고는 입을 다문다. 당장이라도 이 망할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할 수만 있다면 멋들어진 사기업으로 도망가고 싶은 나로서는 그의 말이 더 듣고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한다. 초면에 그런 건 너무 실례인 것 같고, 나는 저 정말 언프리티 랩스타인 고 주사랑 똑같아 보이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다.
그 뒤로도 랩스타 고 주사는 주 주사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 '미생'의 남자주인공처럼 하얀 셔츠빨이 죽이는 남자 직원들이 많은지, 정말 김치 싸대기를 맞는 일도 있는지, 바이어들 앞에서 멋진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빨간 해가 지고 있는 여의도 한강물을 보며 캔맥주를 부딪히기도 하는지 등등.
주 주사는 이전처럼 랩스타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왜인지 내 머릿속엔 아까 주 주사의 안정적이어서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는 대답만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나는 왜 공무원이 됐지?'
주 주사의 대답이 내게 질문을 던진다.
너무 뻔한 질문이어서, 꽤 많이 궁금했던 질문이었지만, 생각해 봤자 딱히 답도 없는 질문이라 외면했던 그 질문.
'도대체 나는 왜 공무원이 된 걸까. 이 망할 공무원이.'
주 주사처럼 당연히 안정적이라는 게 제일 컸을 거다. 잘리지 않는 회사. 요즘 그런 회사는 없고, 무려 그 안정성이 이 대한민국의 최고 법인 헌법에 기재되어 있는 직업.
공. 무. 원.
물론, 헌법에 그런 내용이 있는 건 공시를 준비하고도 한참이 지난 때긴 했지만.
처음부터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직하니 공무원이 인기였다. 그리고 나는 딱히 꿈이 없었고, 그저 수능 때 점수 맞춰 간 지방대 경영학과를 멍청한 눈으로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그렇지 않나? 입시, 수능에 절여진 채 초중고 12년 동안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한 채 죽은 눈으로 지낸 교복 입은 학생이 자기 꿈이 뭔지 어떻게 알까?
그렇게 4학년이 되자 취업을 해야 했고, 이름도 없는 지방대, 거기에 학점도 개판, 대학 인간관계도 진작 아싸가 돼서 아사 직전.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엄마의 등쌀에 못 이긴 척 노량진 공무원 준비 기숙학원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노량진 컵밥에 찌들어 살았고, 정권이 바뀌어 공무원 채용인원이 확 늘어난 첫 해, 나는 다행히 아무런 연고도 없는 수도권 이곳의 지방 일반행정 공무원이 되었다.
꿈이 없었는데, 그렇게 공무원이 되니 그냥 공무원이 꿈인 사람으로, 그 꿈을 이룬 사람으로 주변 모두가 떠받들어줬고, 꿈이 없었던 나였기에, 다행히도 꿈을 이룬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공무원이 되었다.
엄마가 원한대로.
주변 모두가 바란대로.
"공무원이 돼서 너무 행복해요. 꿈을 이룬 기분이에요."
언프리티 고 주사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잘 못 들었다. 다만, 주 주사의 대답이 내 귀에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온다. 주 주사의 목소리에서 정말 그가 공무원이 된 걸 행복해한다는 게 느껴진다. 꿈이 없던 내 옛 모습이 생각 나서였을까? 아니면, 꿈 없이 공무원이 되고 보니 주변 바람대로 공무원이 꿈인 것으로 믿어버린 내가 원망스러웠을까.
"딱 1년. 아니, 한 달, 아니 일주일만 지내보세요. 당장 전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질걸요."
나도 모르게 아주 건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자몽에이드만 빨아대던 내가 던진 한마디에 테이블에 적막이 감돈다. 나는 아차 싶었지만,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는 내 내면의 아우성을 받아들인다.
"뭐야 뭐야~ 박 주사는 늘 이런 식이라니까. 그러니까 민원인한테 그렇게 눈두덩이나 얻어맞고 다니는 거야. 눈치 없이 대화 맥락을 뚝뚝 끊어버리잖아. 참나~ 주 주사님! 박 주사 말 듣지 마요! 딱 10년. 그래 10년만 참아요! 공무원 괜찮아요! 난 좋던데. 안정적이고 얼마나 좋아? 9급은 좀 힘들 수 있지만, 그래도 10년 정도만 참고 다니면 7급만 돼도 사람 취급받을 거니까요! 하여튼 박 주사, 진짜 이상하다니까~"
싸늘하게 적막만 남은 테이블 위로 고 주사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듯 말한다. 자신이 한 말이 정말 주 주사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너무 한심해서 나는 대꾸하지 않기로 한다. 내 말보다, 고 주사의 저 말이 주 주사에게 더 상처가 될 것 같다. 10년 뒤면 주 주사는 50살인데.. 그때까지 사람취급 못 받는다는 말이 정말 위로랍시고 할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니가 이상한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