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주사 이야기4
딸랑-
문에 달린 익숙한 종소리를 뒤로하고 분식집에 들어선다. 팀장과 망할 고 주사, 그리고 나와 주 주사가 허름한 분식집 더 허름해 보이는 테이블 구석에 자리 잡고 앉는다. 팀장 옆에 앉기 싫어 팀장 맞은편에 앉았는데, 망할, 고 주사 고것이 내 옆자리에 앉는다. 내 표정만큼이나 그녀의 표정도 썩어있다.
'살 뺀다며 점심 안 먹는다고 할 땐 언제고 주 주사 있으니까 따라온 꼬라지보소. 쯧'
늘 얄미운 고 주사인데 오늘은 더 얄밉게 느껴진다. 팀점심 같이 한다면 늘 빼고 도망치더니, 아 꼴뵈기 싫어라.
"다 김치볶음밥 드실 거죠?"
고 주사가 평소와 달리 메뉴 주문을 먼저 묻는다. 역시 평소와 아주 다르게 코멩멩이 목소리를 낸다. 역시나 듣기 싫다. 꼴뵈기 싫다. 나는 대답하기 싫어 그냥 못 들은 체한다. 그럼 알아서 시키겠지.
'그나저나 신규 공무원이 왔는데 점심이 고작 분식집이라니. 고작 김치볶음밥이라니!!!'
나는 왜인지 주 주사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사기업에 들어간 친구들에게 들어보면 점심시간에 파스타를 먹기도 하고, 초밥을 먹기도 하고, 그런 고급진 것들을 지겹도록 먹는다던데. 그리고 심지어 계산은 모두 팀장님이 쿨하게 쏘신다고 했더랬다. 친구들은 법카로 쏘는 팀장이 별로라고 했지만, 법카든 뭐든 멋지게 쏘는 팀장이라니. 역시 사기업은 클라스가 다른 것 같다. 부럽다. 주 주사의 눈치를 살피던 나의 눈빛이 팀장의 얼굴로 향한다.
'어휴...'
하마터면 입 밖으로 한숨이 새어 나올 뻔했다. 고개를 들고 분식집구석 위에 설치된 뚱뚱한 티브이를 올려다보고 있는 팀장의 얼굴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 몸도 안 좋으시면서 병가나 휴직을 내셔야 할 분이 도대체 왜 꾸역꾸역 출근하는지 모르겠다. 아프면 얼마든지 오랫동안 쉬고 와도 복직이 보장되어 있는 게 공무원의 유일한 장점 아닌가? 나는 몸 아프면 바로 병가나 휴직을 쓸 계획이다.
'쓸데없이 튼튼하기만 한 내 몸뚱아리라니...'
그러고 보니 동기 중 여럿이 정신과 병원 진찰을 받으러 간다고 했던 게 생각난다. 휴직을 위해서 한 3개월 정도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말이 같이 떠오른다.
나는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 이거다! 하며 무릎을 탁 쳤다. 몸이 너무 멀쩡하니 정신이라도 나간걸로 진단받아 휴직을 쓸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완벽한 방법인가! 아직까지 실행에 옮기진 않았지만, 아마도 조만간 나도 그 동기들을 따라 정신과에 가볼 듯싶다. 요즘에는 이런 공무원들을 겨냥해 휴직을 위해 쉽게 정신과 진단을 내려주는 병원이 있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나중에 꼭 한번 물어봐야겠다.
"이모~ 여기 김치볶음밥 넷, 아, 주 주사님 혹시 다른 거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여기는 김치볶음밥이 제일 맛있어요. 오징어 볶음밥도 괜찮고요."
주방을 향해 소리치던 고 주사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주 주사에게 묻는다. 언제부터 저렇게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아주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게, 사회생활을 똥으로 배운 티가 팍팍 난다.
"아, 저도 김치볶음밥 좋습니다."
주 주사가 씩씩하게 대답한다.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정장 재킷 라인이 직각 90도의 칼날처럼 똑 떨어진다. 멋있다. 사기업 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저렇게 멋있겠지 싶다. 나도 이런 후줄근한 카라티 달린 티셔츠 말고 멋진 정장 재킷을 입고 서울 번쩍번쩍 빌딩 숲을 누비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멋지다. 얼른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지 싶다. 말 나온 김에 휴대폰 화면에 남성 정장을 검색해 본다.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망할.
200만 원도 안 되는 내 작고 ㄱ같은 공무원 월급으로는 엄두가 안 난다.
마음이 답답해진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내 손가락이 서둘러 비트코인 화면을 연다. 마이너스 짝대기 옆에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망할. 주식도, 비트코인도 왜 내가 돈을 몽땅 넣기만 하면 이렇게 마이너스 짝대기를 찔러대는지 모르겠다. 작고 ㄱ같은 내 월급의 유일한 희망이라 굳게 믿고 굳세게 밀어 넣어봤건만 폭락이라니. 나락이라니. 내 인생 같다. 공무원이 된 순간부터 내 월급은 폭락과 나락뿐이다. 공무원으로 사는 한 계속 그렇겠지. 인생 나락이네.
"휴..."
내 입술이 이번에는 마음속 한숨을 막지 못하고 깊게 뿜어낸다. 내 한숨 때문인지 테이블 위 공기가 싸늘해진 기분이다. 팀장은 여전히 맨날 싸워대기만 하는 뉴스를 쏟아내는 낡아빠진 티브이나 올려다 보고 있고, 고 주사는 아주 건방지게 꼰 다리를 흔들어대며 뭐가 좋은지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터치해대고 있다.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나 역시 휴대폰을 끄적거려 본다. 그런데 그때 주 주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다. 일어나는 찰나 그의 표정을 보니 뭔가 불편한 게 있는 듯 구겨져있다. 주 주사가 뭐 하는지 가만 지켜보니 칼날 같은 정장 재킷의 주름을 편 채 어딘가로 걸음을 옮긴다.
주 주사가 손에 허름한 학교에서나 쓸법한 세월이 오래돼 보이는 은빛 스테인리스 컵 세 개를 들고 돌아온다. 그리고는 팀장 앞에 하나, 고 주사 앞에 하나, 그리고 내 앞에 하나 컵을 차례로 내려놓는다. 컵 안에는 시원한 물이 딱 먹기 좋은 양만큼 담겨 넘실대고 있다.
"콜록콜록. 어구, 고마워 주 주사!"
팀장이 왜인지 놀란 기색으로 황급히 주 주사에게 말한다. 순간 나도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민이 든다. 그래도 나보다 열 살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 물을 떠다 주는데 고맙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는 생각과 9급 신규가 떠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부딪힌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나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옆에 앉은 망할 고 주사는 아무렇지 않게 주 주사가 내려놓은 물을 입에 대고 마신다. 꼴 보기 싫다. 자기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사람이 물을 갖다 줬는데, 여전히 다리나 꼬고 고맙다는 내색 하나 없이 저 따위로 물을 쳐마시고 있는 꼴이라니.
나는 저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인지 나도 주 주사에게 고맙다는 말이 쉬이 나오질 않는다. 그저 고 주사에게 지기 싫은 마음이 들어 물컵을 들어 물을 마실 뿐이다. 물맛이 왜인지 쓰다. 왜 이런 죄책감 같은 게 드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저 주 주사는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해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짜증이 솟구친다. 괜히 짜증이 난 나는 고 주사처럼 발을 꼬고 세차게 흔들어대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 분위기가 한층 싸늘해진 것 같다. 이놈에 김치볶음밥은 언제 나오는지 짜증만 난다. 빨리 먹고 나가고 싶다.
"아, 그런데 책임관님은 같이 식사 안 하시나 보죠?"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주 주사가 슬쩍 말을 건넨다. 누구에게 묻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연히 대답할 생각이 없다. 평소처럼.
"책임관님은 아기가 아파서 오늘 오후 반가 내셨어요. 요즘 잦으시네요. 애 키우면서 직장 다니는 워킹맘의 비애죠 뭐. 전 그래서 애 안 낳을 거예요. 책임관님 보면 힘들고 귀찮기만 할거 같아서"
옆에 있던 고 주사가 마치 자신은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티 내고 싶은 것 마냥 잘도 대답한다. 지랄 발랄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 내용을 곱씹어보니 고 주사의 썩은 인성이 고대로 드러난다. 애 안 낳겠다는 소리를 저렇게 밝게 하다니. 누가 자기랑 결혼은 해준다나?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소리를 잘도 해댄다. 요즘 것들은 다 저러나. 쯧. 뭐, 나도 요즘 것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다. 다행이란 생각이 스쳐간다.
"김치볶음밥 네 개 맞으시죠? 나왔습니다."
나는 서둘러 식사를 시작한다. 얼른 먹고 이 불편한 점심자리를 끝내고 싶다. 한입 떠먹는다.
질려빠진 공무원 구내 직원 식당만큼이나 질리고 질린 김치볶음밥 맛이다. 그래도 신규 공무원 왔다고 밖에서 먹자고 해서 나왔건만, 구내식당이랑 뭐가 다른가 싶다. 주 주사는 어떤가 눈을 슬쩍 흘겨 눈치를 살핀다. 밝은 얼굴로 잘도 먹는다.
그러다 문득 왜인지 일부러 밥을 늦게 먹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온 날이라 눈치 보느라 그런가 싶다가도, 그럴수록 주변 사람한테 피해 안되게 빨리빨리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기분이 언짢아진다.
망할 고 주사만큼이나 주 주사도 점점 먹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나는 눈길을 걷어 애써 무시한 채 내 앞에 김치볶음밥을 서둘러 흡입한다. 무시가 답이다. 내 정신건강에 그게 이로울 것 같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고 주사와 주 주사의 숟가락이 빈 접시 위에 올라온다. 그 모습과 동시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한다.
"계산은 팀비로 낼게요. 주 주사님은 이따 따로 보내주시고. 아, 그냥 팀비 이제 주 주사님한테 넘길게요. 괜찮죠?"
나는 팀장과 고 주사를 향해 묻는다.
지긋지긋한 팀비.
내가 속한 팀은 팀장님 포함 매달 3만 원씩 걷는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회식이 있거나 지금처럼 '어쩔 수 없이' 점심을 같이 먹는다거나 하는 것처럼 공금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쓴다. 왜 이 구질구질한 '팀비'는 꼭 현금으로 걷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인터넷은행 어플 써서 계좌이체 하면 걷기도 편하고, 계산할 때도 카드로 긁으면 될 텐데 꼭 현금으로 걷어서 이 망할 꼬깃꼬깃 하얀 편지봉투에 넣어서 보관해야 한단다. 그 금액의 지출내역도 꼭 봉투 위에 써야 하고. 누가 이런 걸 정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고 주사 아닐까? MZ라며 누릴 건 다 누리면서 젊꼰(젊은 꼰대) 짓만 해대는 망할 고 주사.
'사기업이었으면 번쩍이는 법카로 팀장님들이 폼나게 긁었을텐데. 구질구질한 팀비라니. 쯧.'
고 주사를 쏘아보던 내 눈빛이 팀장의 면상로 날아가 박힌다. 팀장은 괜히 멋쩍은지 왼쪽 손으로 왼쪽 머리를 긁으며 내 시선을 피한다.
'어휴. 저렇게 멋대가리 없는 팀장이라니. 아, 나도 사기업 팀장돼서 폼나게 법카로 파스타나 초밥 팡팡 긁으며 살고 싶다. 이 공무원 조직은 답이 없다 답이. 노답!'
팀장의 권위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또 한숨이 난다.
"커피 한잔 할까?"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서둘러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평소와 달리 팀장이 묻는다. 팀장이 웬일로 커피를 먹자고 하는지 모르겠다. 맨날 밥 먹고 나면 사무실 가서 낮잠 자느라 바쁘던 양반이. 뭐 건강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믿음은 안 간다. 팀장의 물음에 커피도 팀비로 해야 하는 건가 싶은 고민이 든다. 팀장이 살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법카 따위도 없는 팀장 따위가 살 리가 없으니까.
그때 좋은 생각이 든다.
아주 좋은 생각!
나는 오늘부로 막내가 아니라는 생각!
바로 옆에 신규 공무원, 그러니까 나보다 짬 딸린 주 주사가 있다는 생각!
그 주 주사가 오늘부터 팀 막내라는 생각!
그러니 그냥 막내에게 이 구질구질한 '팀비' 관리를 맡겨버려야겠다는 생각!
"주사님, 이거 받으세요. 팀비고 이번 달 남은 돈은 삼만칠천이백팔십 원이에요. 맞는지 세보세요."
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숨긴 채 옆에 같이 걷던 주 주사에게 꼬깃꼬깃 구겨진 하얀 봉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