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주사 이야기6
"왜 이렇게 늦게 와? 빨리빨리 교대해 줘야지. 참내..."
사무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기 무섭게 3팀의 팀장의 불만 섞인 소리가 들린다. 분명 혼잣말이라고 구시렁거리는데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든 이에게 들리는 아이러니라니.
나는 거의 다 비운 자몽에이드 컵을 책상 위에 탁 올려놓으며 자리에 앉는다. 슬쩍 우리 팀장의 눈치를 살핀다. 역시나 평소처럼 3 팀장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앉아있다.
'뭐라고 한마디 좀 해주지. 맨날 저렇게 아무 소리 못하니까 우리 팀을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어휴.'
짜증이 확 밀려온다. 내가 팀장이었으면 저 3 팀장처럼 모두가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해주었을 텐데.
"그러게요. 카페까지 갔다 왔어? 참.. 팀장님 얼른 식사 가시죠."
3 팀장을 보필하는 여우 같은 7급 주사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한다. 나는 다시 우리 팀장의 눈치를 본다. 역시나 못 들은 체한다. 같은 7급인 우라 팀 고 주사를 본다. 역시나 못 들은 체하고 있다. 나한테는 맨날 그렇게 난리를 피면서, 어쩜 저렇게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건지. 열받는다.
'어휴... 점심시간도 보장 안 되는 이따위 공무원이라니!!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그러다 그냥 이 공무원 조직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혹시 점심시간에 방문하거나 전화하는 그 대단한 민원인을 위해 교대로 밥을 후다닥 먹고 돌아와 자리를 지켜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흠흠. 가지."
3 팀장이 손에 들고 있던 태극기를 원래 있던 벽에 일부러 '탁'소리를 내며 건다. 그리고는 팀장, 고 주사, 나 그리고 주 주사를 한 번씩 째려보고는 3팀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사무실 문 밖으로 나간다.
'뭐 좋다고 태극기를 맨날 저렇게 닦아대는 건지... 아무튼… 이상해… 다 이상해! 그냥 다!'
부화가 치민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자몽에이드를 쭉쭉 빨아 들이마신다.
3 팀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저렇게 다 낡아빠진 나무틀 액자에 걸려있는 태극기를 떼 열심히 닦아댄다. 조용히 닦기만 하면 그런 괴상한 취미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닦을 때마다 꼭 이상한 잔소리를 해댄다. 특유의 혼잣말인 듯 다 들리는 잔소리를.
그 잔소리는 대부분 공무원인 자신이 일하는 이 나라를 위한 사랑과 이 나라의 소중함을 모르는 요즘 젊은것들에 대한 비판이다. 뭐라더라? 본인 말로는 요즘 것들은 나라 소중한 줄 모른다나.
'이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 절망적인 취업률? 사망 직전인 출산율? 아무 미래도 없는 이 나라가 무슨.'
3 팀장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 생각밖에 안 든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루빨리 이 공무원을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과 때려치우고 폼나는 사기업으로 이직해서 돈 많이 벌어 딴 나라로 이민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꽤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 어렵게 된 공무원의 꿈이 하루빨리 공무원을 때려치우는 거라니. 어디 그뿐인 게? 거기서 더 나아가 이 나라를 뜨는 거라니.
'나 혼자 살아남기도 힘들어 뒤지겠는데, 내가 나라 걱정까지 해야겠어? 빌어먹을.‘
나는 학창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왠지 빨간 얼굴로 홍익인간을 말했을 것 같은 단군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배우면 배울수록 답답하기만 한 일제강점기 근현대사까지. 이 땅의 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이 불쌍한 땅덩어리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정학적 위치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잘도 포장했지만 결국 툭하면 전쟁 나지, 다른 나라 눈치도 봐야 하지, 탐관오리 윗 것들은 늘 탐욕만 넘치지, 아래 것들은 툭하면 이리저리 줘 터지지!
지금이라고 뭐 다른가?
도대체가 이 땅에서 좋았던 시절이 있기나 했나 하는 생각.
그렇게 이 나이 먹도록 이곳에 살아남아보니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각자도생.
나라고 나발이고, 나만 잘 먹고 잘살자.
그렇게 죽어라 살아도 잘 먹고 잘살긴커녕, 배달비 아까워 후덜덜하는 월급 백따리 공노비 삶 주제에 무슨 놈의 나라 사랑까지?
그리고 뭐?
요즘 것들은 나라 소중한 걸 모른다고?
'어이구. 그러세요~ 그렇게 귀한 나라, 본인이나 물고 빨고 하세요. 그 대단한 나라의 한낱 공노비인 저는 제 몸뚱이 하나 추스리기도 힘이 듭니다~ 슈퍼 꼰대어르신!!‘
3 팀장이 걸어놓은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액자 왼쪽 위 모퉁이가 살짝 내려와 삐딱하게 걸려있다.
‘얼마나 밥이 먹고 싶으셨으면 그렇게 소중해마지 않으시는 그 나라의 상징을 저렇게 삐딱하게 걸어놓고 후다닥 나가셨을까. 나라보단 역시 밥이 중요하죠. 그렇죠 어르신?‘
삐딱해진 마음으로 휴대폰을 열어 초록 검색 창에 '이민' 두 글자를 눌러본다.
투자이민, 해외이민, 부자들이 한국을 떠나는 이유 등등의 정보의 글자들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무심한 손가락을 뻗어 하릴없이 터치를 이어간다.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이민이라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린다.
따르릉-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본능적으로 시계를 본다. 열두 시 사십 분. 누가 매너 없이 점심시간에 전화를 거나 괘씸한 생각이 든다. 동시에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든다. 옆에 앉아 멍청한 눈으로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는 고 주사를 째려본다. 분명 전화벨 소리가 들릴 텐데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안 들리는 척할 수 있는지 어이가 없다.
따르릉따르릉-
전화가 계속 울린다. 아무도 받지 않는다. 주 주사를 슬쩍 쳐다본다. 나처럼 그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다. 눈이 마주친다. 내 눈빛도 저 주 주사처럼 심하게 흔들리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처음 온 사람한테 받게 할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든다.
제기랄.
민원인이다. 왜 이렇게 전화연결이 안 되냐고 소리를 먼저 빽 지르고 시작한다. 점심시간에 전화해서 전화 왜 빨리 안 받냐고 소리치는 민원인의 빽 소리를 듣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어이는 더 없고. 그저 차분히 용무를 묻고 또 물을 수밖에. 그렇게 가만 듣고 보니 고 주사의 업무다. 나는 재빨리 고 주사의 전화로 민원인의 전화를 돌린다. 처음부터 고 주사가 받았으면 나도, 고 주사고, 민원인 모두가 좋았을걸 싶다. 제기랄.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거칠게 수화기를 내던지며 여전히 이민의 정보가 넘실대는 휴대폰을 향해 의미 없는 눈길을 던진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기... 박 주사님..."
언제 다가왔는지 내 바로 옆에서 주저하는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