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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박 주사 이야기 2>

살고 싶어서 킹무원이 되었습니다 Vs. 죽기 싫어서 좋무원을 때려칩니다

by 한태현 Mar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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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주사, 여기로 와서 인사해요. 여긴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주 주사님. 서로 인사해요.”


과장의 소개에 박 주사가 떨떠름한 눈빛으로 주 주사를 바라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아침에 그 개념 없던 VOLVO 까마귀가 자신의 후임으로 올 줄이야. 역시 하루라도 빨리 이 망할 공무원을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빠르게 확신으로 물든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참 사람 인연이란 게… 하하.. 아침에는 죄송했어요.”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의 주 주사가 박 주사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의 행동에 박 주사는 굳이 악수까지 할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핑계라면 핑계겠지만, 그는 손에 다한증이 있기에 그에게 악수는 영 불편한 것이었다. 하지만 손을 잡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듯한 주 주사의 굳건한 손과 과장의 불편해하는 눈빛에 박 주사는 결국 그의 악수에 응했다. 다행히 자신의 손에 땀이 많지 않다. 왜인지 잡은 그의 손이 따뜻하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화를 엿들으니, 사기업에서 일하다 온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다. 바로 그때 박 주사의 머릿속에 그에게 사기업이 어떤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분명 이 망할 공노비, 망할 좋무원보다 훨씬 좋을 그 사기업에서 오래 근무했으니, 어쩌면 자신에게 공무원을 때려치게 할 답을, 용기를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그에게서 반드시 답을 들어서 저 망할 과장 얼굴에 면직 신청서를 박박 찢어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친다. 그와의 악수는 짧은 악수였을 뿐임에도 박 주사에게 악수가 아닌 묘한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자, 그럼 자리로 가서 업무 인계해 줘요. 아, 박 주사. 너무 무리한 건 박 주사가 좀 하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말을 마친 과장이 의미심장한 눈길을 박 주사에게 건넨다. 그 모습에 박 주사는 어떻게 그 일이 있고도, 상사라는 사람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공직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아니, 여기 모두가 그런 것 같았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척 살고 있다. 그날 이후 불안에 떨고, 두려움에 숨 막히고, 소름 끼치는 입막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건 자신 뿐인 것 같다. 이 절망뿐인 조직에 왜 자신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왜 당장 때려치우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망칠 용기도 없는 거겠지. 휴….’

결국 박 주사의 숨기지 못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나갔다.


“여기 앉아서 잠깐 기다려주세요. 업무 인계서 하나 뽑아올게요.”

주 주사에게 그의 자리를 알려준 박 주사가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박 주사는 그날 이후 그동안 공석으로 비어 있던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채워져 있는 그 자리가 어색하고 두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걸 보니 자신도 주변 공무원들과 다를 바 없나 하는 묘한 자책이 피어올랐다. 그는 그런 불편한 마음을 떨치려는 듯, 거친 손길로 모니터 한쪽에 저장된 인계서 파일을 열고 출력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 업무를 줘도 될까….'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출력되기 시작한 인계서를 내려다보는 박 주사의 눈동자에 짙은 망설임이 비쳤다. 그 일 이후 그동안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서 자신이 억지로 부둥켜안고 버텨온 업무였다. 원래 박 주사 자신의 것이었지만, 누군가에게 넘겨줬었고, 그날 이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버렸던 업무.

그 절망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늘 처음 출근한 신규 공무원에게 이 업무를 인계하는 게 맞는지 망설여졌다. 당장이라도 그날의 절망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다.


"뭐야 뭐야?~ 박 주사~ 벌써 선임 노릇 하는 거야? 호호. 쉬엄쉬엄해~ 우리 주 주사님 첫날부터 갈구지 말고. 호호!"


박 주사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 주사가 주 주사를 향해 말했다. 내용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데, 왜 맞은편 주 주사를 보고 말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또 목소리는 왜 저렇게 큰지 모르겠고, 또 눈치는 왜 저렇게 없는지 더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많으셨다고…. 쯧. 나이도 어린 게 꼴에 선임이라고 따박따박 반말이나 하고. 아침부터 온갖 게 다 재수 없게 걸리적거리네. 망할! 망하고도 또 망할!'

그녀의 목소리에 박 주사는 망할 눈두덩이 상처가 짜증스럽게 욱신거렸다.


고 주사는 7급으로 박 주사의 선임이었다. 그녀와는 처음부터 악연이었다. 박 주사가 이 팀에 발령받고 온 첫날, 인수인계를 받던 그 순간부터. 첫날 자신의 자리에 앉은 박 주사는 깜짝 놀랐다. 왜냐? 자신의 자리에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뭐냐고?

바로 컴퓨터.

‘아니, 행정직 공무원인데 컴퓨터가 없다는 게 말이 돼?’


당연히 안된다.

"아, 박 주사. 이거 가져다 써! 나는 내가 쓰던 컴퓨터가 아니면 일이 안 돼서."


멍한 눈을 깜빡이던 박 주사는 무슨 소린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고 주사의 책상 밑에 컴퓨터 본체가 떡하니 두 대가 있는 게 보였다.


'세상에…. 정말 있었네. 인수인계 때 자기 컴퓨터 통째로 뽑아서 가져간다는 망할 것이!'

그랬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자신이 기존에 쓰던 컴퓨터 본체를 갖고 자기의 새로운 자리로 옮겨 간 것이었다. 컴퓨터를 통째로 가져간 게 왜 문제냐고? 문제다.

아주 큰 문제.


공무원의 인수인계는 상상 초월로 아주 거지 같다.

그동안 인사 발령이 날 때마다 받았던 박 주사의 인수인계 과정은 참으로 화려했다.

처음 9급으로 임용되어 업무를 인계받을 때 전임자는 종이 쪼가리 하나만 달랑 남겨놨었다. 그것도 그 큰 종이에 단 세 줄도 넘지 않는 문장만 남겨진 아주 형편없는 인수인계서 한 장. 공무원이 첫 직장이었던 박 주사는 다른 회사의 인수인계도 모두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나 싶었다.

그때 받은 그 종이 쪼가리 하나 부여잡고, 당장 그날부터 민원인 응대하면서 탈탈 털린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하! 주사님. 저도 새로운 업무 하느라 정신없거든요. 제가 인수인계서까지 직접 남겨드렸잖아요. 그거 보시고 알아서 하세요. 여기 다 그렇게 일해요."

팀을 옮긴 전임자에게 전화해 물으면 여지없이 돌아오는 답은 이것뿐이었다. 아니면 아예 전화를 안 받던가. 욕만 안 했지 그냥 꺼지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그렇게 그날부터 박 주사에게 인수인계는 악몽으로 남아버렸다. 아니, 모든 공무원이 이럴걸?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죽어라 피땀 흘려 공부하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해서 간신히 된 공무원. 자신 같은 자식도 공무원 됐다고 본인 친구분들에게 전화해서 자랑에 자랑을 이어가시는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때려치웠으면 그날 그런 끔찍한 일은 겪지 않았을까…’

그렇게 같이 발령받은 동기들과 옆, 앞에 앉은 주사님들 그리고 팀장님께 어찌저찌 여쭤보면서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그다음으로 인사 발령받은 곳이 바로 저 망할 고 주사의 옆자리, 이 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업무 인계는 이전보다 더 최악이었다. 그녀는 세 줄짜리 인수인계서 종이 쪼가리조차 만들어 주질 않았다. 이번에도 9급 처음 발령받아 업무 인계받았던 그때처럼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고 주사에게 물어본다 해도 그때 그 전임자처럼 똑같은 소리나 해대겠지.


다들 이렇게 잘만 하는데, 못하는 자신이 이상한 거라는, 정말 뭣 같은 소리.


그런데 고 주사는 그것도 모자라, 인수인계 때 자기 컴퓨터까지 몽땅 뽑아 가버린 것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망할 것이 자신의 선임이라는 생각에 정말 치가 떨렸다. 그것도 저렇게 태연하게 호호거리면서 말할 수 있는 뻔뻔함까지.


박 주사에게 업무 인계 시, 전임자의 컴퓨터가 없다는 건 정말 큰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게 인계가 엉망이었어도 그나마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던 방법의 하나는 공무원 내부 시스템에 저장되어 있는 이전 연도의 공문 자료들을 찾아본 것이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전임자가 컴퓨터에 저장해 둔 지난 문서들을 찾아보면 얼추 업무를 처리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망할 고 주사는, 자신이 만든 자료를 후임자가 볼 수 없도록 컴퓨터를 통째로 빼 가 버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뭐 저런 게 있지? 아직 오전 업무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 몇 번째 때려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진짜.’


"호호. 주 주사님! 박 주사가 혼내면 저한테 이르세요. 내가 대신 혼내줄게, 호호!"


고 주사가 주 주사를 향해 소름 끼치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박 주사는 어제 민원인이 던진 볼펜이 자신이 아니라 저 망할 것의 눈에 확! 꽂혔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스쳤다.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렇게 악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루하루 매 순간 온통 악의 똥 꾸러미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주 주사님, 이쪽으로 와 보시겠어요? 이 업무 인계서 한번 보시고요. 그리고 여기 공문 모아놓은 거 보이시죠? 이전 공문서들 다 저장돼 있으니까 보시면 될 거고. 더 필요한 건 법령도 찾아보시고. 이게 이번에 우리 팀 업무분장 공문이고요."


고 주사의 불편한 말들을 무시한 채, 박 주사가 굳이 주 주사를 자신의 옆으로 불러 세워놓고 업무를 인계하기 시작한다.

문득 자신보다 주 주사가 연장자니까 그의 자리로 직접 가서 알려줄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뭐 그렇게까지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주 주사도 안 잘리고, 자신도 안 잘리는 철밥통 공무원인데 이 정도 좀 막 대하면 어떤가 싶다. 자신도 그런 취급당하기 일쑤였는 걸. 이 망할 좋무원 조직에서 그런 건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주 주사는 이런 대우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박 주사의 옆에서 업무 인계서로 가득 찬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묘한 흥분이 새어 나왔다.


"아! 주 주사님, 제가 이거 알려드릴까요? 호호. 여기로 잠깐 와봐요. 안 더워요? 재킷도 좀 벗고!"


그런데 바로 그때, 옆에서 지긋이 둘을 보고 있던 고 주사가 주 주사를 향해 말했다. 그러더니 보란 듯 그의 재킷을 당겨, 자신의 옆 보조 의자에 끌어다 앉혔다. 어벙한 표정이 된 주 주사가 잠시 박 주사의 눈치를 보는 듯 쭈뼛거리더니, 이내 고 주사 옆에 끌려가 신규 특유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망울을 끔벅인다. 고 주사는 그런 주 주사에게 자신의 모니터에 시스템 화면을 열어 보여준다. 그러더니 <일상경비>와 <일반지출>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온갖 재정 회계 시스템을 장황하게 소개하기 시작한다.


‘아니, 예전에 나한테는 지 컴퓨터를 통째로 뽑아가더니 참…. 하! 때려치고 싶다! 진심!!’


박 주사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보란 듯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의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에 국민신문고 화면이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도 아까 포스트잇에 있던 내용과 같은 민원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쌓여있다. 또 한숨이 난다.


"벌써 점심 식사 시간이네~ 주무팀! 오늘 국장님이랑 같이 식사하는 거 알죠? 준비하고. 아, 맞다! 박 주사는 점심시간에 우리 주 주사님 특별히 신경 써주고. 첫날이니까~ 알죠?"


저 멀리 혼자만 우아한 파티션 뒤에 숨어 온종일 뭐 하고 앉았는지 모르겠는 과장이 우리 팀을 향해 소리친다. 거지 같은 열여덜개의 민원에 어떻게 답변해야 하나 고민만 했을 뿐인데, 오전 업무시간이 다 끝나 버렸고,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공무원에겐 허락되지 않은 점심시간이.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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