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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Apr 05. 2022

Ep2. 장기근속 직장인은 능력자일까 무능한 걸까.

모니터 속 그들의 세상은 어땠을까.



"장기근속 회사원은 능력자일까 무능한 걸까."


아인의 고민은 거기서 시작했던 것 같다.

"당연히 능력이 엄청나니까 계속 근무할 수 있는 거지!!!"

이런 의문엔 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예소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아인은 빙긋 웃었다. 아인도 그렇게 믿었던 때가 있었다.


나의 첫 회사. 소중한 그 회사. 이 회사를 위해서 내 남은 삶은 충성을 다하겠노라고.

오직 이 회사를 위해 열정 페이? 오케오케. 내 시간, 몸과 뼈를 갈아 넣고 가능하다면 영혼까지도 갈아 넣으며 소위 사회 초년생들이 그렇듯 정말 이 회사를 내 회사로 생각하겠다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인정받고, 돈도, 명예도 따라오고 그렇게 회사 임원 자리 하나 꿰차고 나만의 팀을 꾸려 해외 프로젝트도 성사시키고. 작은 이름 세 글자 업계에 길이 남기고 박수받고 은퇴하리라. 그런 때가 오리라 그렇게 믿었더랬다.

그토록 순수한,하지만 지독했던 사회초년생의 그때.


"팀장님 죄송하지만 저 그만두려고요.."


이게 정녕 내 입에서 나온 말인가?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탄 아인은 여전히 떨리는 손을 보며 생각했다.

아인의 팀장인 설 팀장은 업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으로 통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회사에서 25년째 근무 중인 설 팀장을 보는 업계 사람들은 정확히 두 분류로 나위어졌다.


능력이 출중해서  회사에 그렇게 오래 남아있을  있는 것이라 보는 사람들과

이직 능력이 없으니 거기라도 간신히 붙어있다고 보는 사람.


아인의 눈에 비친 설 팀장은 당연히 후자였다.

열정뿐인 초년생이었던 아인은 연차가 찰수록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한 3년쯤 뼈 갈아 넣고 일한다는 느낌이 들고 4년 차쯤 되었을 때였나.

'설 팀장은 어떻게 팀장 자리까지 올라갔을까?'


아인의 눈에 비친 설 팀장은 정말 능력이 출중해서 승진 경쟁자들을 짓누르고 그 자리까지 올라갈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단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잘 써서 그를 보좌할 능력자들을 잘 쓰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의 장점은 무엇일까?

굳이 꼽아보자면 회장에게 하루 종일 독대로 온갖 인격모독을 들어도 회장실에서 나올 때 웃으며 나올 수 있는 안타까운 낙천성. 그리고 자존감이라고는 1도 없이 회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어쩌면 회사는 능력좋은 직원보다 그런 직원을 선호하는걸지도 모른다.

적당한 업무처리능력과 회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갖춘 직원. 그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아인은 생각했다. 내가 저 나이가 되면 나도 저렇게 돼있을까. 쩜쩜쩜.. 생각만 해도 너무도 한숨 나는 삶인데..


아인은 버스 창 밖 강남역을 지나며 보이는 휘황찬란한 간판들 틈바구니에서 본인이 하염없이 작아짐을 느꼈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아.. 설 팀장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쟁쟁한 능력자들 틈에서 살아남은 거 아닐까?

능력 있는 이들이 계속해서 더 나은 직장을 꿈꿔 찾아보고 회사를 떠나 실제로 행동에 옮길 때도, 그는 그저 묵묵히 사장의 욕받이로,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잘도 포장해서 살아남았겠구나.. 본인의 능력은 같은데 주변 능력자들이 조직을 다 떠나니 결국 혼자 남게 되고, 연차는 차고. 그래서 승진하고.'


아인이 길지 않은 사회생활에서 느낀 점 중 한 가지는 "결국, 하는 놈만 한다"는 것이었다.


대학 경영학 수업시간에 배운 적이 있는 것 같다. 결국 어떤 조직이든 일부의 핵심인재들이 조직을 이끌고, 나머지의 보통사람들은 따라갈 뿐.

하는 놈들은 계속해서 발전을 고민하고, 제안하고, 실천한다. 그리고 그들을 핵심인재라고 명명한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는 매일 하던 일만 반복하고 싶어 하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그러한 본인의 길에 온갖 불합리의 명목이 붙더라도, 바꿀 이유도, 의지도 없다.

이들이 옳고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그날 아침, 아인의 눈에는 더 이상 그 사무실에 그 '하는 놈'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너무나 강렬한 현실로 다가왔을 뿐. 비어있는 오 차장의 자리와 햇볕 잘 드는 김대리의 자리.

그날은 이상하게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그 빈자리들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깨닫고 나니 아인도 어렵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아인은 그래도 새삼 '아-그래도 내가 이 회사에서 하려고 하는 놈이긴 했나 보다'하는 씁쓸한 안도감과 '더 이상 같이 할 사람이 없으니 더 이상 미련도 없구나'하는 결심만 남았을 뿐.


무초점 무감정의 눈을 꿈뻑이는 아인은 그렇게 퇴사를 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에 사무실에는 십수명의 '동료들'이 여전히 앉아있었다.


모니터  그들의 세상은 어땠을까.

본인들의 행복이 정말 그 모니터 속에 있다고 믿었던 걸까? 아니면 불편한 사장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들에게 아인이 정말 동료로 받아들여졌을지는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능력있는 사람들은 본인의 살길을 찾아 떠나고, 결국 남는 사람들은 여기 아니면 갈 곳 없는 사람들뿐이라는 냉철한 현실감이 아인을 둘러쌌다.

버스 안 멍한 눈으로 창밖 화려한 네온사인을 보는 아인의 눈엔 어느새 작은 물방울들이 자리 잡았다.


'회사 때려치우기 전에 옮길 직장 무조건 찾아놓고 가야 되는 거야. 알았냐 아인?' 술냄새 풀풀 풍기며 꼰대같이 조언하던 오 차장의 얼굴이 스쳐간다.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던진 퇴사 출사표의 날카로움이 새삼 아인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 시각, 회사 건물 한편에 마치 무언의 시위라도 하듯, 아직 꺼지지 못한 사무실 불빛이 하나 있었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것 같았던 아인의 퇴사 소식에 분개한 '동료'가,


거기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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