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메디오스 Sep 29. 2021

내 몸에 대한 도발적이고 발칙한 이야기들

…그녀의 눈동자는 아궁이처럼 붉었다. 나는 두 눈이 그을리는 줄도 모르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김재훈, 그녀의 눈동자는 아궁이처럼 붉었다-      



 눈이 부쩍 건조해졌다. 


 생전 눈물액 따위 사용한 적이 없었건만 최근 몇 달 간은 없으면 외출조차 못할 정도이다. 눈동자를 까끌까끌한 모래밭 위에 굴리는 것만 같다. 당장의 불편함뿐 아니라, 내 눈이 빠르게 망가지고 있다는 불안감마저 커진다.     


 신체 부위 중 중요하지 않는 곳이 없다지만 눈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고대에서부터 '눈은 마음의 창'이라느니, 영혼을 드러낸다느니 각종 상징과 비유의 수단으로 사용됨은 물론이요,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속담들도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집트의 신 호루스는 눈을 통해 낮과 밤의 원리를 통달하여 세상을 꿰뚫어보게 됐으며,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와 바실리스크가 신까지 죽일 수 있었던 강력한 힘도 눈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양안 10 디옵터에 이르는 초도도근시 보유자로서 내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는, 나와 같은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눈 건강에 신경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의 지도 아래 독서 중에도 책과 나 사이 거리를 30cm 이상 꾸준히 유지할 정도였다. 어디에서부터 어그러졌을까. 아마 안경에 대한 환상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피어오르면서였으리라.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안경을 썼다. 당시 TV에서는 안경 착용 여성의 이지적인 이미지를 한창 전파하던 중이었고, 또래들은 안경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점점 멀리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면서 근시 판정을 받고, 매우 당당하게 안경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몇 초마다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 옆에서, 나는 그저 안경을 매만지며 신이 나 있었다. 나도 이젠 명석한 엘리트처럼 보이겠지, 검지로 안경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는 내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일까. 그야말로 10대 어린 소녀만이 할 수 있는 망상이었다.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절망으로 변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정만화 주인공들은 안경을 쓰지 않으며, 연예인들이 쓰는 안경은 시력 교정용이 아닌 장식용이기에 내 안경처럼 눈 크기를 줄이거나 얼굴선을 변형시키는 일 따위 결코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로는 매일 생 당근과 결명자차를 들이키며 어떻게든 시력을 회복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안경알은 더욱 두꺼워지기만 했다. 안경 쓴 내 모습은 아무리 많이 봐준대도 B사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때늦은 여드름이 이마와 볼을 뒤덮기 시작하면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은 폭락하는 주식마냥 수직하강 했다. 예쁜 친구들을 보면 질투에 선망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몰랐다. 그와 비례하여 자존감은 지구 내핵까지 뚫고 들어갈 듯 끝도 없이 추락해 나갔다. 앞머리와 옆머리를 길러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다니기도 했다. 사춘기 소녀의 슬픔을 눈치 채신 부모님께서 나를 공주라고 부르며 자신감을 되찾아 주기 위해 노력하셨지만, 이는 아름다움을 타고나지 못한 나를 더욱 슬프게만 했다.      


 한 번 망가진 눈은 원상복구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 후 나는 시력교정술에 천착했다. 그러나 각막의 두께가 얇은데다 이미 초고도근시인 탓에 라식은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을 받은 이후에는 콘택트렌즈에 대한 정보들을 파고들었다. 안경알과 안경테를 하루 몇 시간만이라도 내 눈앞에서 치워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듯했다.      


 끈적끈적하고 두꺼운 점성의 비닐 덩어리들이 눈동자를 감싸는 게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어린 시절 자연 교과서에서 보았던 올챙이 알들을 떠올리며 몸서리치던 것도 잠시, 원래부터 내 눈과 하나였던 것처럼 달라붙어 시야를 밝히는 이 신묘한 물건들에 나는 감동받았다. 이후로는 뒷일 생각하지 않고 콘택트렌즈를 통해 내 안구를 마구 혹사시켰다. 권장시간 이상 착용은 당연했으며,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간 날이면 술에 취해 렌즈를 착용한 채로 깜박 잠이 들기까지 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내 두 눈이다.     

 

 인간의 몸은 원래 딱 40세 정도에 맞추어 설계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다. 40세가 신체의 생애전환기라는 이야기다. 노인 냄새를 유발하는 노네랄 성분도 40세부터 분비되기 시작하며, 만성질환 발병률이 높아지고, 녹내장과 백내장 위험이 높아지며 생식기관 노화마저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니 남녀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억울해진다. 최소 40년 이상을 퇴행하는 신체로 버텨야 한다는 이야기이지 않는가. 진화의 결과이든, 신의 뜻이든 뭐든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생애 조건이 태초와 달라졌다면, 눈 정도는 한 번 갈아 끼울 수 있게 해 줬으면 하는 우스운 망상까지 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콘택트렌즈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 타고난 악조건의 눈을 구제해 줄 시력교정술에 대한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평균수명대로라면 나는 아직 살아갈 날이 너무나도 많고, 남은 기간 동안 내 기준대로 예쁘고 싶다. ‘망할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게 인간’이라고, 흔히들 말하지 않던가. 스스로 초래한 절망과 아득한 희망 사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오늘의 나는 몰라도 내일의 나는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입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