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예술의전당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나에게 신이다.
1.신은 그를 따르는 추앙자들에게서 잊혀질 때 전설로 격하된다는 말이 있다. 유피테르와 주노, 마르스와 다이아나는 오늘날 신이 아니라 신화로 받아들여진다.
2.공연을 많이 임하다 보면 할 말이 그다지 없어 보였던 공연에 대해 뜻밖에도 말할 거리가 쏟아져 나올 때가 있는 반면에 반대로 할 말이 넘쳐날 것 같았던 공연에 대해 말문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러하였다.
수년 전 지메르만과의 첫 만남이 아직도 선명하다. 우연히 귀에 흘러들어온 황홀한 소리, 그때의 내가 음악에 대해서라곤 정말이지 쥐뿔 만큼도 몰랐던 것을 생각하면 그때 받은 충격의 층위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불에 덴 듯한 찰나의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서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만들어졌으니 그 소리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기념비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당시 들었던 것이 지메르만의 역사적인 도이치 그라모폰 "발라드 1번" 음반이었다.
이후로 지금까지도 수년간 짐메르만은 나에게 있어서 격렬히도 사랑하는 은사이자 연주자의 정석이었다. 번스타인이 이끌던 시절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 2번, 슈베르트 소나타와 즉흥곡,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등 그가 연주자로서 데뷔한 이래로 연주했던 대부분의 레파토리를 가슴 깊이 새겨 줄줄이 읊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사실 이번에 3년만에 내한한 그의 연주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꿈의 실현이었으며 지극한 영광이었다.
문제는 연주 자체였다. 오늘의 연주는 "슬펐다”. 화가 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음에도 너무 슬픈 나머지 기분이 무척 울적해져버렸다.
이번 공연에서는 바흐 파르티타 1, 2번(Partita n. 1, 2) 과 브람스 인테르메쪼 op.117(Intermezzo Op.117), 쇼팽 소나타 3번(Sonata n.3)이 연주되었다.
바흐의 소리는 분명 좋았다. 규율적이었으며 동시에 흐름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명백히 인지하고 풀어나가는 게 보였다. 보통은 연주자의 연주가 손색이 없으면 감탄하게 되는데 연주자가 지메르만이었기에 그 부분이 놀라웠다기보다는 소리 자체가 너무나 정교하게 세공된 나머지 언뜻 눈에 보이는 듯한 환상이 들어 잠시 취해있었던 것 같다.
한편 브람스 인테르메쪼는 그에게 다소 적절하지 않았다. 특히나 인테르메쪼의 경우 조금 더 따뜻하고 명상적인 소리를 선호하는 입장으로서 (일례로 라두 루푸의 브람스 음반을 들 수 있겠다) 원래 연주자의 음색이 칼같이 정제된 날 서 있는 성격을 띄기에 선호도의 측면에서 쉽게 설득되지는 않았다. 이는 음악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전적으로 음색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굳이 말하자면 음악적 해석이나 프레이징, 다이내믹 등의 것들은 가히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메르만 아닌가. 사실은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다.
내가 말하는 난감할 정도의 "큰 문제”는 쇼팽 소나타 3번에서야 드러나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경악스런 광경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후에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바흐 레파토리 직후 인터미션 때 누군가 사진 촬영을 시도했다고 한다. 아는 사람은 모두가 알 법한 이야기지만 지메르만의 천재성은 그 특유의 병적인 강박증과 완벽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크다. 본인의 피아노를 세계 곳곳으로 수고스럽게 운송하며 연주를 하고, 또 언젠가는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생기자 연주를 중도에 중단하고 나가버리기도 했던 그다. 그래서 그의 공연에서는 공연장에 입장하는 그 순간부터 사진 촬영을 삼가도록 지도받는다. 커튼콜과 앵콜 때에도 마찬가지로 엄격히 금기시되는데 누군가 기어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던 것이다. 언제나 한두 명씩은 꼭 있어왔기에 구태여 길게 탓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병적인 강박 때문인지 기분이 아주 크게 상한 짐메르만은 그 여파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2부의 연주에 충격적인 모습으로 임했다. 살면서 짐메르만의 연주에서 건성과 대충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언제나 믿을 수 없는 완벽한 연주와 음악에 한해서는 거룩하고 신성적인 모습만을 보여줬던 그였다.
그런 와중에도 1악장은 뛰어났다.
한 세기를 대표하는 '쇼팽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그의 명성을 아낌없이 내비쳤다. 그러나 2악장에서 누군가가 믿을 수 없게도 또 잡음을 내었고, 이번에는 연주 도중에 청중을 노골적으로 돌아보며 묵묵하게 쏘아보더니 불안한 줄타기 끝에 전례없게도 형편없는 4악장이 나왔다. 악장의 클라이맥스에서 가장 그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미스터치와 가시적인 건성의 향연이었다. 소리가 섬뜩하리만치 또렷이 들려야 할 패시지가 싸그리 뭉개져 내가 지금 뭘 듣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단순히 기분의 탓은 아닐 테다. 심지어는 경박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그의 연주에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든것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앵콜 또한 원래는 폴란드 작곡가 시마노프스키의 프렐류드로 사전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형식적인 인사만을 마친 후 그는 앵콜 없이 퇴장해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은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소나타 3번을 칠 때 나는 저 상태로 짐메르만이 앵콜을 연주할 리가 없다고 미리 생각했던 것이다. 연주자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쯤 되는 정상급 연주자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만족할 만한 음악을 내어보이겠는가.
어떤 연주자들에게는 음악이 그저 틀리지 않고 해나가는 행위가 아닌 그로서 하나의 의식이자 본질적인 완벽을 추구하는 수행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그러나 못내 아쉬웠고 관객들 또한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말이 많았던 공연이었다.
앵콜을 취소한 것과 더불어, 기분이 많이 안좋아 보였다는 둥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와중 앞서 말했듯이 나에게는 그저 가면 갈수록 침잠하는 슬픔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내가 추앙하는 음악가, 영원할 것 같았던 그가 종내에는 노쇠하여 시대의 뒤안길로 들어서 버린 듯 보였다. 어쩌면 많은 위대한 연주자들의 말년을 지켜봐오며 느꼈던 안타까움 중 가장 쓰린 감상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귀에는 언제나 진솔해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내 손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이는 것과 같은 절망스러운 심정이 든다고 해도. 글을 쓰다 문득 멍하니 앉아 생각해본다. 여러번 생각해도 같은 결론에 다다르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생각한다. 아마도 인장을 찍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결국 오늘은, 할 수 없이 실망 뿐인 연주였다.
++글을 쓴 후 지인에게 듣기로, 2부 연주 직전의 관객 헤프닝으로 인해 지메르만이 2부 연주를 취소하겠다는 걸 관계자가 겨우 만류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