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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y 02. 2024

#6. 보류 손님

    POS기에는 보류 기능이 있다. 등록해놓은 상품 목록에 보류를 걸어놓고 새로 계산을 시작하는 기능이다. 상품 바코드를 다 찍었는데 손님이 하나 더 가져오겠다고 자리를 비우거나 앱카드로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인증 절차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때 유용한 기능이다. "뒷 손님 먼저 계산해드려도 될까요?" 하고 양해를 구한 다음 계산 순서를 바꾸면 앞 손님도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고 뒷 손님도 불쾌할 일이 없다.


    가끔은 보류가 세 개 이상 걸릴 때도 있다. 손님들이 계산 도중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연달아 생기면 그렇다. 여기에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손님들이 계산대를 장바구니처럼 쓸 때이다. 물건 하나 골라서 계산대에 올려놓고, 또 하나 집어서 올려놓고, 이런 식으로 손님이 매대와 계산대를 왔다갔다 해버리면 당장 계산해야 하는 다른 손님이 물건을 내려놓지 못하고 눈치만 보게 되고 대기줄이 길어진다. 게다가 물건을 하나씩 가져오는 손님들 중에는 계산원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이미 바코드를 찍은 상품을 빼버리는 분들도 계셔서 일일이 상품을 확인하느라 계산 시간이 두세 배로 걸린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일할 때는 "바구니를 이용해 주세요."라거나 상황을 보고 "여기에 올려 놓으시면 안 돼요."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계산대 자체가 비좁아서 다른 손님이 고른 물건과 섞이기 쉽고,  매장 자체가 소규모라 줄이 생기면 밖에서 보기에 복잡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트에서 일할 때는 대처 방식이 아예 바뀌었다. 제지하기는커녕 "어머니, 고르신 거 계산대에 갖다놓을게요."하고 청과 팀장이 딸기를 들고 와서는 "다른 것도 보신다니까 이따 같이 계산해 줘."하고 맡기고 갔다. 아무래도 마트는 입구 앞에 팔레트를 놓고 이것저것 팔다 보니 밖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이 하나씩 들고 오는 일이 흔했다. 주로 대파, 쪽파, 무, 양파 등 막 입고된 싱싱한 채소나 특가 세일로 파는 귤, 딸기, 토마토, 오렌지 등 부피와 무게가 꽤 되는 것들이어서 여간 귀찮지 않았다. 손님들이 깐깐하게 살펴보고 맘에 드는 걸로 골라온 것이라서 물건 주인을 혼동하면 큰일이었다.


    처음에는 들어오자마자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고 "잠깐 기다려 봐."하고 사라지는 손님들이 얄미웠다. 그것도 내가 딴일을 하고 있을 때 물건만 틱 하고 놓고 사라지면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손님은 끊이지 않고 계속 오는데 그럼 나는 오는 분마다 "이것도 같이 고르신 분이세요?"하고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이렇다 보니 계산대를 사유화하는 손님들이 이기적으로 보이고 좀처럼 친절한 말투가 나오지 않았는데, 같은 상황을 계속 겪다 보니 새로운 점이 보였다.


    그렇게 행동하는 분들 대부분 적어도 40대 후반, 많으면 80대이신 손님이었다. 즉, 중년이나 노년이 겪는 흔한 신체 변화를 겪고 계신 분들이란 뜻이었다. 어떤 분은 2kg짜리 가루세제 끄트머리를 잡고 오셔서는 계산대 위로 못 올려서 낑낑대었고, 어떤 분은 감자 한 봉지를 올리는데도 심기일전을 하고 어깨에 힘을 실어야 했다. 물건을 허리 높이로도 못 올리는 분들에게 어떻게 "장바구니를 쓰세요."라고 말하겠는가. 30대인 나조차도 장바구니에 두세 개만 담아도 무겁고 귀찮아서 팔이 축 처지는데.


    손님들이 왜 물건을 하나씩 갖다놓는지 이해하게 된 다음부터는 내가 먼저 "그거 여기 놓고 가세요."라고 말하게 되었다. 보류를 걸었다 풀었다 하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때로는 헷갈려서 다른 손님에게 애먼 물건을 계산한 적도 있지만 어찌 손님을 탓하겠는가. 사정도 모르고 멋대로 손님을 이기적이라고 판단해버리고 아줌마, 할머니라는 특정 연령과 성별에 그릇된 선입관을 세울 뻔한 지난 날의 과오를 뉘우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마트 덕분에 누군가 쉽게 해내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고통과 수고가 따르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이런 걸 보면 살면서 마음 속에 보류 버튼 하나 심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요즘은 사진이나 짧은 영상만 보고 한 사람의 인성까지 판단해버리는 세상이다. 첫인상이 어떻든 잠깐 보류를 걸어놓고 오래 지켜보는 여유와 배려를 갖춘 사람이 되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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