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모두 마스크를 써야할 때가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단지 코와 입을 막고 다녔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기에 코에 있는 모공이 눈에 띄게 커져서도 아니다.
생각보다 내가 훨씬 별로인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스트레스가 곱절로 늘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어서 오세요.”가 아니라 “마스크 착용해주세요.”였다.
아무리 출입문에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써 붙여도
그걸 못 보는 건지 못 보는 척 하는 건지 맨 얼굴로 들어오는 손님이 절반 이상이었다.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듣는 쪽과 하는 쪽, 둘 중 어느 쪽이 더 죽을 맛일까.
내가 마스크를 써달라고 요청하면 손님 얼굴에 지겹다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나마 그쯤 마스크를 꺼내 써주면 감사할 따름.
안 들리는 척 무시해 버리거나 금방 나갈 거라고 대꾸해버리면
나혼자 뼛성을 참느라 무진장 애써야 했다.
마스크를 턱에 걸쳐 놓고서 썼다고 우기는 사람을 상대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생기를 잃어가던 어느 날,
한 손님이 맨얼굴로 편의점에 들어와서 얼른 마스크 매대로 향했다.
마스크가 없어서 마스크를 사러 온 손님에게 마스크를 써 달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헛웃음을 지을 무렵 그 손님이 애써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계산대로 다가왔다.
‘그래도 이 분은 자신의 실례를 인지하고 계시군.’
이런 생각에 아무말 없이 계산을 끝내고 손님을 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확진자가 우리 편의점을 다녀갔다고. 그것도 마스크를 안 하고서.
어제 내가 마스크를 판 그 손님이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기를 느끼며 앞으로 내 사전에 친절은 없다는
과장된 다짐을 했다.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사로자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코로나에 감염되었다면 일을 하지 못할 테고 그럼 당장 생활비가 빠듯했다.
하루에 손을 스무 번도 넘게 비누로 씻고,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매일 세 번 이상 지자체 누리집에 들어가 확진자 동선을 확인하고,
행여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절대 마스크에 손을 대지 않고,
가는 곳마다 아낌없이 소독제로 손을 혹사했던 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건 순간이었고 마음고생을 분통해 하는 시간은 길었다.
분을 풀려면 누군가를 탓하긴 탓해야 했다.
누리꾼들이 특정 국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틈틈이 들여다 봐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보다 구체적인 원망의 대상은 일상에 있었다.
알게 뭐람, 하는 표정으로 마스크를 써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이것저것 상품을 만지는 손님을 보면 가슴 저 밑바닥부터 뜨거운 기운이 뻗쳤다.
이런 순간이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 손님을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정체를 숨기고 호시탐탐 나를 정복할 기회를 노리는 음흉한 바이러스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손님으로 마주했다.
구부정한 허리에 깡마른 체격이었고 걸음걸이는 느렸고
무엇보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어르신은 유유히 우유팩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왔다.
“마스크 써 주세요.”
“이게 얼만가?”
“…….”
어르신 뒤에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실랑이를 벌일 여유가 없었다.
나는 바코드를 찍어 가격을 말씀드렸다.
어르신은 동전지갑에서 반의 반의 반으로 접힌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낸 뒤
지갑을 뒤집어 놓고 동전을 느짓느짓 세어갔다.
하나, 둘, 서이, 너이….
어르신이 세기 전에 나는 이미 눈으로 그 동전을 다 세었다.
우유 값으로는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어르신이 동전을 내밀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오백 원 더 주셔야 해요.”
“다 된 거지?"
“오백 원 모자라요!”
나는 어르신이 귀가 어두우신가 싶어 손바닥을 쫙 펴 ‘오백 원’에 힘을 실어 말했다.
“더 줘야 된다고?”
“네에.”
나는 자꾸 어르신과 대화를 섞는 게 탐탁치 않았다.
보이지 않는 비말이 내 얼굴에 얼마나 튀었을까, 그 생각에 자꾸 짜증이 치밀었다.
어르신은 아쉬운 듯 빈 지갑만 헤적이다 계산대 위 우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우유를 도로 갖다놓으려던 찰나,
“어르신 제가 보태 드릴게요.”
뒤에서 기다리던 손님이었다.
옷맵시가 단정한 중년 남성이었고, 해사한 얼굴에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그분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손에 쥐고 있던 오백 원짜리 동전을 나에게 건넸다.
“아이고, 고마워라. 잘 먹을게요.”
“아닙니다. 조심히 가세요.”
이 따뜻한 일화 속에서 내 역할이 악역이었음을 눈치 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낯 뜨거웠다.
제아무리 편의점 알바라도 오백 원 정도는 기꺼이 내줄 수 있었는데.
어쩌면 저 흰우유 500ml가 어르신의 한 끼 식사일 수도 있는데.
길거리에서 채소 파는 할머니만 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일 년 내내 감성의 우기 속에서 살던 나는 어디로 가버렸나.
왜 이럴 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건가.
이 모든 건 코로나 때문이다.
그릇이 작은 내가 내린 옹졸한 결론이었다. 소인배다운 결론이다.
위기의 상황에 본성이 튀어나온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튀어나온 본성을 부정하고 위기의 상황을 탓해버리기. 참 멋지다.
2024년, 코로나 시대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요즘은 취향껏 귀여운 키링을 가방에 달고 다니는게 유행인데
나는 흉측한 유령을 달랑달랑 달고 다니는 중이다.
유령의 실체는 바로 코로나 시대에 목도해 버린 누추한 내 본성이다.
덕분에 자신감이 확 쪼그라들었고 자아 존중감도 반토막이 났다.
유령과 작별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또 바이러스에 위협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도루묵이 될지도 모르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순 없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좋은 사람보다는 별로일지 몰라도
좋은 사람이 될 생각조차 없는 사람보다는 나으니까.
어쨌든 마스크여 안녕.
넌 내 얼굴의 반을 가리면서 인간성도 반나마 가려버렸던 잔인한 일회용품이었어.
네가 생필품이 되는 시대는 두 번 다시 안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