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프렌즈>
총 10개의 시즌, 10년 동안 방영한 미국의 TV 시리즈 '프렌즈(Friends)'가 끝났다. 끝난 지가 언젠데 무슨 말이냐고? 미안하지만 내겐 이들과의 이별이 현재 진행형이다. 한 에피소드 당 20분 남짓, 한 시즌은 대략 20개의 에피소드니까 한 시즌당 400분, 총 4,000분의 시간을 몽땅 프렌즈에게 바친 게 벌써 두 번째. 방금 두 번째 정주행을 마친 지금, 이 미친 중독성을 가진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프렌즈를 절대로 봐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하지 않을 것이니, 혹시라도 영업당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나가주시길 부탁드린다. (농담이다, 들어온 이상 절대로 나가지 말고 댓글도 달아주십시오.) 하지만 프렌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한 명 더 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그러니 당신이 이 광인들 틈에 끼든 안 끼든 그건 나와 관련이 없다. 물론, 이 글을 보는 당신들은 높은 확률로 광인 무리 중 하나겠지만.
뉴욕에 거주하는 여섯 명의 친구가 있다. 모니카와 그의 형제 로스, 룸메이트 관계인 챈들러와 조이, 모니카의 옛 룸메이트 피비, 그리고 모니카의 학창 시절 친구이자 로스의 짝사랑 상대인 레이첼이 새롭게 합류하며 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체 이야기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로스-레이첼 커플, 그들이 인생의 전환점을 장황한 실패로 얼버무린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이야기는 출발한다. 로스는 레즈비언이 된 아내와 이혼하게 되고, 레이첼은 결혼식 당일에 파혼을 선언한 채 고등학교 동창인 모니카에게로 온다. 그 시각 모니카와 로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일행은 집 근처 카페 '센트럴 퍼크'에 모여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모두 20대 중반에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 청년들이고,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연애나 그들 주변의 잡다한 이슈들이다. 그들 앞에 레이첼이 등장하고, 로스가 자신의 여동생의 친구인 그를 좋아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는 건 또 아니다. 사실 '프렌즈'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한결같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매일같이 모니카의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친구들, 매일같이 같은 카페에 모이는 친구들. 어느 순간 이들은 TV 속 배우가 아닌 옆집에 사는 깔끔 떠는 여자, 매일 애인이 바뀌는 윗집 남자쯤으로 변모한다. 시청자로서의 존재감은 사라진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들의 일원이 되어 매일 같은 곳으로 출근하듯 회차를 시청한다. 반복, 반복, 반복된다. 시즌이 다 끝나도 상관없다. 그들과의 이별을 만끽하기도 전에 다시 시작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봐도 재밌다. 아니, 다시 보니 더 재밌다. 이것은 우리가 젊고 좋았던 시절을 자꾸만 얘기하고 싶은 심리를 자극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반복되는 젊음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듯 이 시리즈를 즐기던 나는 어딘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한다. 어느 날, 조이와 챈들러로 구성된 남자 룸메이트들과 모니카와 레이첼, 여자 룸메이트들이 편을 먹고 각자에 대한 질문을 맞추는 게임을 한다. 이기는 팀이 더 크고 좋은 모니카의 아파트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에피소드가 시작하기 전 나는, 재밌을 것 같다는 기대감과 열혈 시청자로서 함께 맞추고 싶은 욕구로 가득했다. 그런데 상상도 못 한 질문들이 나온다. '모니카가 수건을 분류하는 방법은 몇 가지일까?' 혹은 '챈들러가 비디오를 집으로 주문할 때 쓰는 이름은 무엇일까?' 각자의 캐릭터성이 드러나는 게 무척 재밌긴 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이건 전 에피소드에 나오지 않은, 시청자인 내가 모르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TV에 출연하지 않은 그들의 '이전' 모습을 맞닥뜨리는 게 갑자기 불편해진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그들을 다 알 거라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왜 나는 그들을 다 안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공개되었다고 믿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하루 중 20분을 요약해서 보여줄 뿐인데 왜 나는 그들을 다 안다고 생각했을까?
흔히 작법의 기술을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단연 '입체적'일 것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공익 광고 혹은 선전 방송이 아니다. 옳은 말만 하고 우월한 신체를 지닌 영웅적 캐릭터를 만들면 동경의 대상은 될 수 있겠지만 실존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강해 보이지만 실은 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우월함을 가졌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리석은 행동을 하며, 절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변하기로 마음먹는 것. 이렇듯 인간의 나약함과 위대함 모두를 납득이 가도록 만드는 것이 캐릭터 생성의 법칙이다. 그런 측면에서 프렌즈는 그 법칙을 꽤 충실히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섯 인물은 '프렌즈 캐릭터 MBTI'가 인터넷 밈으로 떠돌 만큼 규칙적이고 확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는 엉뚱한 판단과 결정으로 시청자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진짜 같아도 그들은 진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분명 어딘가 '캐릭터' 같은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끈끈한 관계성이다. 무슨 말이냐고? 그들은 싸워도 절대 갈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만큼 끈끈한, '대단한' 친구관계여서가 아니다. 한때는 나에게 왜 이런 친구들이 없을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분명 나에게 친구들이 있는데도, 이들만큼 끈끈하거나 가깝지 않은 것 같다는 갈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때 내린 결론은, 내가 그들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친구가 불편하게 하면 화를 내고, 지겨워서 관계를 끊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서 관계가 애매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관계는 이런 지긋지긋한 애매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모든 면이 장점으로 보이다가도, 깔끔 떠는 모습이 싫어지고, 징징거리는 게 싫어지고, 가벼워서 싫어지고, 멍청해서 싫어지고, 엉뚱해서 싫어지고, 욕구를 이기지 못해서 싫어진다. 늘 적당한 온도로 관계를 유지하는 건 희생자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이 드라마에는 그런 면이 없다. 그들의 '엉뚱한 사랑스러움'은, 결점은, 절대 서로를 미워할 만큼 과도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은 서로 간의 물리적 거리감이 생길 때에야 비로소 관계의 변화를 맞이한다.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내 사람'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킨다는 사람은 공감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은, 일면 친구를 불편해하고, 지겨워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잊지 말자. 그들은 캐릭터고, 여기는 나약하고도 위대한 진짜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하물며 10년을 함께 연기한 프렌즈의 배우들도 각자 더 친한 사람이 있다. 왜 모니카랑 피비는 맨날 둘이만 만나서 사진 올리고 레이첼하고 찍은 사진은 안 올리냐는 얼토당토않은 댓글은 달지도 말자. 드라마 '프렌즈'는 아주 유쾌하고 길이길이 기억될 청춘 드라마는 될 수 있지만, 현실의 인간들이 따를만한 이상적인 인간관계론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바깥세상으로 나와, 또 현실과 싸우고 괴로워야 한다. 단순하고 가볍지 않은, 복잡하고 미묘하고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 다사다난하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현실세계에는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프렌즈는 모니카와 챈들러가 떠나고 이후의 이야기가 끊긴 채, 다시 1화부터 정주행 해야 하는 시청자로서의 비련한 운명만이 남아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들이 준 유쾌한 에너지를 받아 다시 일상생활을 이어나간다. 그 정도의 거리감으로, 드라마와 시청자는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를 만족시킨다.
위대한 대장정의 첫 회, 부모님으로부터 지원도 끊기고 결혼도 엉망이 된 레이첼이 세상에 뛰어드는 중요한 순간이다. 모니카는 말한다. "현실 세계에 온 걸 환영해! 거지 같긴 하지만 마음에 들 거야(Welcome to the real world! It sucks, you're going to love it.)" 세 번째 정주행을 시작한 지금 그 말이 더욱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그들 앞에 펼쳐질 10년 동안의 시간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마음 아픈 이별과 엇갈리는 괴로움을 새어나가지 않게 잘 꿰매고 소화하기를. 그들의 미래를 보고 온 것 같은 신의 너그러움으로, 혹은 그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기꺼이 겪을 친구의 마음으로 다시 관찰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