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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Sep 14. 2020

그녀는 그 박카스를 언제부터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까?

        언제가 소개팅남이 ‘통화가 되게 인상적이어서 어떤 분일지 궁금했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내가 평범, 그 자체라고 생각했으므로 ‘인상적’이라는 평가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으면서 내가 ‘고맙습니다’라고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가 지적하기 전까지 업무가 아닌 전화도 그렇다는 것을 몰랐다. 뭔가 좀 어이없기도 했고, 그가 특이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끝을 ‘고맙습니다’로 마무리 짓는 건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생긴 나의 습관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너무 기계적으로 ‘고맙습니다’를 남발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의 힘을 믿고 있다.      


        엄마는 사모님으로 살다가 아빠의 사업이 망하고 나서 갑자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사모님이었던 엄마의 모습은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 엄마는 늘 바빴다. 한시도 쉬는 때가 없었다. 내가 무남독녀라는 사실을 밝힐 때면 귀하게 자랐을 거라며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거의 모든 일을 혼자서 해야 했다. 비록 부모님의 바쁨을 이해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유치원 등 하원도, 초등학교도 입학식을 제외하고는 혼자 다니는 것으로 최대한 협조했다. 다행히 엄마 손을 많이 타는 아이는 아니었다. 나는 그 시절을 우리 가족의 소박했던 한때라고 기억하지만, 엄마는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엄마 아빠의 고단하고 치열한 삶을 매일 지켜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것저것 따지면 엄마의 생각이 맞다. 내가 중학교 2년이 되기 전까지 우리 집은 5평 남짓한 단칸방이었으니까. 엄마 아빠가 다시 집을 갖는 데는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그때 처음 내 방도 생겼다.     


        가난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를 크게 힘들게 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 5학년 내 생일에 친구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나 혼자만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이 사실을 알렸을 때 엄마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친구들은 다 잘 사는 집 애들일 텐데, 우리 집 보고 너 가난하다고 안 놀아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며 엄마는 망연자실했다. 그날의 엄마 표정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만큼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혹스러움이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 집이 가난한다는 생각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했다. 그제야 내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았다. 시작이나 과정이 어찌 됐던 예정대로 내 생일 파티는 우리 집에서 열렸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평소에는 보지 못한 음식들이 상 위에 가득 담겨 있었다. 남부끄럽지 않은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엄마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내가 알리는 없었다. 다만 엄마가 나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꼈다.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친구들이 나와 안 놀아주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친구들을 초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생일 파티가 됐다. 뒤늦게 가난을 알아서도 우리 집이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다. 엄마를 다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별다른 기술이 없었던 엄마의 직업은 그때그때 바뀌었는데, 엄마가 했던 여러 일 중 하나이자 가장 오래 했던 일 중 하나가 건물 청소 일이었다. 엄마는 3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까지 건물을 옮기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견뎠다. 나는 그것이 단지 엄마의 일이라고만 여겼고, 어떤 삶이었는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엄마의 일을 이해하게 된 것은 내 일을 갖고, 여러 건물들로 출근을 하면서부터였다.  

   

        어느 건물이든 청소를 하는 분들이 있었다. 나는 그분들에게서 엄마를 보았다. 가난을 몰랐던 나의 그날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지 내 눈으로 확인했고, 지금 내 나이 때 엄마가 감내한 게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그러면서도 엄마에게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고마운 마음이 들 때면 나는 그냥 사랑한다고만 했다. 엄마에게 말 못 한 고마움은 대신 그분들께 표현했다. 그분들께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오래전 대본을 쓰기 위해 평소 출근하는 시간보다 한참 전인 아침 7시에 사무실에 갔다. 우리 방 청소를 담당하는 분이 들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죄송하다 말하고 황급히 빠져나가려고 했다. 딱 봐도 우리 엄마뻘 되는 분이었다. 그분이 나에게 죄송할 일이 전혀 없는데도 너무 미안해하셔서 내가 더 당황했다. 늦게까지 야근하면서 대책 없이 어질러 놓은 상황이라서 청소가 시급했다. 나가시던 분을 붙잡고 ‘저기 어머님! 너무 죄송한데, 지금 청소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난감해하시는 눈치였다. 아,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분께 주책없이 ‘어머님’이라고 불러서 마음이 불편하신가 보다 했다.      


        어색한 공기 속에 나는 내 일을 했고, 그녀는 그녀의 일을 했다. 급하게 청소를 마치고 후다닥 나가려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반사적으로 말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아차! 또 실수했다 싶었지만 그녀는 처음과 달리 인자한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아무래도 그분께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신경이 쓰여서 아침에 있었던 상황을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분이 난감해했던 이유는 아마 ‘어머님’이라는 호칭 때문이 아니었을 거라고 했다. 청소 용역 업체에서 당부하는 주의 사항이 몇 가지 있는데, 되도록 직원들 눈에 띄지 말라는 게 그중 하나라고 했다. 이유는 불쾌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나? 하... 세상 참, 불쾌할 것도 많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분은 내가 혹시라도 컴플레인을 걸까 봐 걱정했던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 순간 또 엄마 생각이 스쳤다.     


        매주 그 요일만 내가 일찍 출근했기 때문에 한동안 그분을 볼 수는 없었다. 내가 그분을 다시 만난 것은 그다음 주 같은 요일이었다. 그분이 등장하자마자 나는 ‘저는 컴플레인을 걸지 않아요’라는 마음을 함축한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이 정도 상냥함이면 그분이 느꼈기를 바랐는데 전달이 됐는지 이번에는 크게 당황함 없이 인사를 받아주셨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처럼 나는 내 일을 했고, 그녀도 그녀의 일을 했다. 잠시 후 청소를 마친 그녀는 ‘고마워요, 수고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내 책상 위에 박카스 한 병을 올려놓고는 미처 내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청소를 해준 건 그녀인데, 그녀가 내게 고맙다고 하는 이유를 몰라 멍하니 박카스만 바라봤다. 지금도 그 이유는 잘 모른다. 나는 그냥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고마워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한 가지는 그녀가 그 박카스를 언제부터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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