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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Mar 16. 2024

고백 공격.

        어떤 고백(?)은 설렘이나 달콤함이 아니라 오직 공포만 남길 때가 있다. 내게는 그날 밤이 그랬다.        


        저녁 7시 30분, 퇴근길 지하철 안. 내 머릿속엔 온통 ‘지금 주문해야 집에 도착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겠지?’ ‘뭐 먹지?’ ‘고기가 먹고 싶다!’ ‘이왕이면 맥주도 마셔야겠다’로 들어차 있었다. 그런 생각에 미쳐있는(!) 순간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오직, 한 가지 생각에 꽂혀있는 나뿐이다. 이게 문제였을까.      


        지하철에서 단골 돼지갈비 집에서 싱글 세트 배달 주문을 마친 후 다음으로 오로지 맥주에만 생각을 집중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경망스럽다. 매일 보는 주변. 이리저리 둘러볼 것도 없이 직진 모드로 집 앞 편의점에 들어간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맥주뿐. 계획대로 딱 한 캔만 사서 집으로 향한다. 물론 큰 사이즈로. 이제 목적지가 코앞이다. 이대로 2분 후면 돼지갈비와 맥주 조합으로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피스텔 입구에서 비번을 치고 들어와 바로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때마침 엘리베이터는 1층에 있었다. 주저할 것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거기까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주 순조로웠다. 딱 거기까지는.     


        올라갈 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바로 직전. 그러니까 내가 열고 들어온 건물 입구 문이 ‘달칵’ 잠기려던 찰나, 그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한 남자가 외쳤다. 


        “잠깐만요.”          


        습관이 참 무서운 게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열림 버튼을 눌렀다. 순간 찾아온 불길함. 


        아! 근데, 이 사람... 우리 건물에 사는 남자가 아닌 것 같다. 같은 건물에 사는 이들과는 한 번도 약속한 적은 없지만 암묵적으로 지키는 룰이 있었다. 웬만하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지 않는 것. 그래서 내가 앞설 때도, 내가 뒤따라갈 때도 속도 조절은 서로에게 필수이자 배려였다. 이곳에 산 지 1N 년, 떠나려는 엘리베이터를 붙드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보려 했지만 문은 이미 열려버린 후였다.       

    

        그렇게 나는 그와 마주 섰다. 다시 닫힘 버튼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 나를 때리면 어떡하지? 칼을 들고 있는 강도일까? 아니면... 아니면...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뭘까... 다소 위험한 생각은 많았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류의 돌발상황이 닥치면 항상 얼음이 되어버리는 탓에. 


        엘리베이터 문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대치 상황이 얼마쯤 이어졌을까? 아마 5초? 길어도 10초는 안 되었을 것이다. 용기를 쥐어 짜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리 동안이라고 해도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데다 아주 멀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솔직히 겉모습으로는 내가 상상하는 나쁜 일을 벌일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하긴 연쇄 살인범 강호순도 생긴 건 멀쩡했지. 내게 닥친 상황이 감당되지 않아 머리가 하얘져서 벌벌 떨고 있던 그때. 그가 말했다.          


        "저기...... 핸드폰 번호 줄 수 있어요?"    


        예상치 못한 전개. 엘리베이터 문을 반사적으로 연 것처럼 이번에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혼이 반쯤 빠진 채로.     


        "아.. 니.. 요.."

        "아... 네..."     


        이내 단념한 그는 바로 건물을 빠져나갔고, 나는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연타로 눌렀다. 집에 무사히 도착한 후에도 심장은 계속 도망치듯 뛰고 있었다. 놀란 심장을 다독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서글펐다. 그래도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고, 고맙다.     


        이 이야기를 주변인들에게 털어놓자 누구는 낭만으로, 누구는 신문 사회면으로 판정했다. 어디서부터 나를 따라왔는지.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은 친구들과 내기였는지. 또 다른 꿍꿍이를 위한 빌드업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순수한 호감 그 자체였는지. 그의 진심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나의 오해에 상상까지 더 해 지나친 공포로 확대시킨 건지도 몰랐다. 분명한 건, 그 순간 나는... 정말 무서웠다는 것. 

     

        매일 하던 경계를 풀어버릴 때가 있다. 이를테면, 그날 밤이 그랬다. 우편물을 챙길 때는 아무도 없을 때 가져간다. 특히 밤에 집에 올 때는 누가 따라오는지 주의한다. 비번을 누를 때는 주변을 둘러본다. 건물 입구 문이 잠기면 엘리베이터에 탄다. 그날 마음을 뺏겨버린 게 정확하게 맥주인지, 돼지갈비인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지켜온 루틴을 대부분 무시했다. 그나마 우편물을 집에서 나올 때 챙겨 나온 터라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만이 그 순간 유일한 위안이었다.           


    어쩌면 많이 설렜을 일이, 두고두고 아찔했던 기억으로 남겨지게 됐다. 어떤 고백은 공포로만 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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