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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ug 29. 2022

꽃 부부

내가 누리는 하나의 호사가 있다면 아침에 남편이 내려준 커피를 들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일이다.

 그럴 때면 남편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냐하면 습관처럼 중얼거리는 내 혼잣말 때문에.   

   

‘사람이 땅에서 살아야지. 언제까지 이 공중에 매달려 살아야 하나... 결국 여기서 죽겠군.’     


물론 남편 들으라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남편에게 하는 소리는 맞았다. 여전히 나는 아파트, 특히 실버아파트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저기 멋쟁이 할머니 할아버지 내려오시네. 오늘은 패션이 핑크야.”

이 한마디 말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얼른 거실로 와서 함께 그 광경을 보곤 했다. 

“정말 저렇게 늙어야 하는데. 오늘은 분홍색 꽃이 걸어오시는 것 같네.”     



나는 그 노인부부를 매일 보아 왔다.

그들은 매일 산에 갔고 나는 매일 커피를 마셨으며, 나의 커피 자리에서 그들의 동선이 빤히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눈으로만 보던 부부를 직접 만난 것은 가을이 시작되기 전 A단지 카페에서였다. 늦더위에 입맛도 없어 빵을 사러 들렀는데 그들 부부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도 연둣빛 등산복을 갖춰 입은 모습을 본 터라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제가 매일 두 분을 뵙거든요? 저희 거실에서요. 너무 좋으세요.”

그분들은 나를 반가워했고 자신들의 집과 교회까지 소개를 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교회의 사모님은 나의 지인이었고, 그 사실에 할머니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할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것도 그 사모님을 통해서였다. 두 달쯤 전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사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저기, 수고스럽지만 2007호 할머니 댁에 좀 다녀와 주시면 안 될까요? 할머니 따님이 출발은 하셨다는데... 아마 우울증이신 것 같아요.” 


일요일이었고 교회의 사모님은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급한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나는 할머니 댁이 있는 B단지로 달려갔다. 

실버 아파트 단지 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노인 달리기를 한 것이다. 지나던 노인들이 흠칫거리며 내게 길을 내주었고 뒤돌아서 나를 구경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잠옷 차림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방금 사모님의 전화를 받았다며 고맙다는 인사는 잊지 않았다. 적어도 치매는 아닌 듯해서 다행이었다.

“할머니, 교회 가셔야죠. 오늘 주일이잖아요?”

나는 늘 멋쟁이였던 할머니의 무너질 듯한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뭘 할 수가 없네요. 그 양반 가시고 나서는 ...”

할머니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할머니를 위로하느라 뭐라고 말은 했으나 그냥 아무 말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할머니는 느리게나마 푸념하듯 자신의 삶을 풀어놓았다. 

평생 한량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은 남편 때문에 할머니는 스스로 가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독립적인 여인이었다. 할아버지와는 애당초 깊은 정도 없었고, 지병으로 죽을 날도 받아 놓은 터라 크게 상심하지도 않았단다. 

그러니 내가 아침마다 봤던 꽃 부부는 모양만 꽃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걸까? 할머니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되었던 남편을 먼저 보내고 그마저 담담했는데, 무엇이 할머니를 기억 저편의 세계로 돌려놓았을까? 할머니는 혹시 노인성 우울증이신가?

     

“정말 갓난아기처럼 뭘 할 수가 없네요. 저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밥도 먹을 수가 없고 화장품을 바를 수도 없어요. 옷도 입지 못하겠으니 어떻게 교회를 가겠어요?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됐어요.”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 할 것 같아 식당에 모시고 가려했으나 일어서질 못했다. 놀랍게도 걸음마를 잊은 아이 같았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때 할머니의 딸이 혼비백산하며 도착했고 난 조용히 자리를 떴다.      



꽃 부부가 나란히 걷던 그 길을, 나의 커피 자리에서 너무도 빤히 보이는 그 길을 걸어 내려오며 우리 집을 올려다보았다. 창가는 비어 있었다.      


만일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도 할아버지의 두 팔이 늘어졌을까?

그의 두 다리가 걷는 걸 잊어버렸을까?     


나는 어떨까?      


이젠 아침마다 꽃 부부를 볼 일이 없으니 남편을 꽃 보듯 보며 커피를 마셔야 할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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