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개인듯 Aug 18. 2022

실버 시에스타

 이사를 하고 정신이 좀 들자 노인들인데 이웃이 되었다는 신고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근처 떡 카페에 가서 선물용 떡을 골라 10개를 포장했다. 머리가 희끗하고 점잖아 보이는 가게 주인도 우리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남편은 떡 카페 주인이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말이 뭐 그렇게 반가운지 고향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자주 와야겠다는 긴 통성명을 했다. 

 난 다시는 남편과 떡 카페에 오지 말아야겠다고 가만히 결심했다.      


 “아유 좋아하시겠네. 이사 오셨다고 떡 사 가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순간 어? 오버인가?라는 의미심장한 단문이 떠올랐지만 드러내지 않고 각각 투명한 비닐 백에 포장해서 들고 왔다. 

 혹시라도 집에 안 계시는 경우에는 현관 문고리에 걸어둘 생각이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포스트잇에 손 글씨를 써서 비닐 백에 붙이라고 했다. 남편은 내용을 알려달라고 했다. 

 “내용은 무슨? 이사 왔으니까 그냥 인사말 쓰면 되지.”

 짜증 섞인 내 말에 알아서 쓰기라도 하련만 남편은 끝내 내게서 문장을 얻어냈다.      


 <1005호에 이사 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떡 봉지를 든 남편을 대동하고 세대마다 벨을 눌렀지만 약속한 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우리 10층 9세대와 아래층도 모두 조용했다.      

 도대체 다들 어딜 간 걸까? 떡이 더운 날씨에 상하진 않을까?           


 여러 물음이 생겼지만 일단 버려야 할 쓰레기가 두 봉지나 되어서 양손에 쓰레기봉투를 든 채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로비는 200평은 족히 될 만큼 넓은 곳이었고 층고가 아파트 두층을 뚫어놓은 듯 높고 시원했다. 그리고 군데군데 쉴 수 있는 의자나 소파가 구비되어 있었다. 물론 비어있기는 하나 안내 테이블도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드웨어는 호텔 로비였으나 소파마다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앉은 노인들은 나의 온전한 현실감각을 일깨우는 살아있는 오브제였다.     


 ‘와우~ 양로원이 따로 없네. 내가 양로원을 찾아 제 발로 기어들어왔구나. ’


 나도 모르게 한숨이 폭 나왔다. 내 나이도 결코 적지 않았지만 평균 80은 넘어 보이는 노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내가 살던 이전 세계와는 많이 다른 곳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시던 요양원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다.      


 “아줌마, 떡 잘 먹었어.”

 로비를 지나 부지런히 집을 향한 공동 출입문을 들어서는데 1004호 할머니가 웃으며 소리쳤다. 할머니는 막 집에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안 계신 것 같아서 그냥 문에 걸어놨는데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가긴 어딜 가? 산에 갔다 와서 한 숨 잤는데 떡을 걸어 놨더구먼.”

  할머니는 뒷짐 쥔 손 하나를 풀어 흔들며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      

 

 ‘모두들 낮잠 시간인가? 노인 아파트엔 시에스타가 있는 모양.’     


 아버지도 그랬다. 

 점심 이후엔 잠시 주무시고 저녁 이후에도 잠시 주무셨다. 그리고 밤엔 잘 안 주무셨다. 

 아무 때나 주무시고 아무 때나 깨어 계셨다. 

 아버진 혼자 남은 삶을 지루해하시며 밤낮을 당신 맘대로 사시다가 밤도 낮도 아닌 이른 저녁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시에스타였을 뿐인데 난 몰랐나?     


 이런저런 생각 속에 복도를 걸어가는 데 걸어놓은 떡 봉지가 다 사라져 있었다. 

 “떡들은 다 가져가셨던데?”

 남편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아까는 시에스타였던 모양이야.”

 “?” 

 남편이 시에스타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귀가 차츰 어두워가는 상황이었다. 

 “낮잠 시간이라 다들 벨 소리를 못 들으셨나 봐.”

 “아, 시에스타. 낭만적이네. 스페인 같잖아.”     

 40년이나 그럭저럭 함께 살아온 남편인데 이렇게도 감정의 결이 다를까 싶었다. 

 “아니, 공식적인 낮잠 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대개 주무시는 것 같다고. 낮엔.”

 공연히 화가 나서 나지막하지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TV 리모컨을 켜며 중얼거렸다. 

 “그 말이나 그 말이나.”     


 남편은 벌써 실버 아파트 주민으로 완전히 적응된 것 같았다. 하긴, 남편도 식후엔 거의 졸거나 자기 시작했으니까.     

이전 04화 우리 집에 놀러 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