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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ug 09. 2022

첫 만남

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오동통한 몸매의 공인중개사는 첫 느낌이 매우 부드러웠다. 

남편은 이 공인중개사를 택한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집을 구하러 왔는지 공인중개사를 선택하러 왔는지 목적을 잠깐 잊은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남편과 달리 계속 망설이는 내가 신경이 쓰였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설명을 했다.      


“이 실버아파트는 전국 최대 규모의 분양형이에요. 중요한 건 대형 병원이 옆에 있는 거죠. 아파트에서 병원까지 전용 통로가 있는 데는 아마 여기밖엔 없을 거예요. 그리고 저건 장례식장인데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장례식장이 보이는 동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거든요. 어떠세요?”


내려다보니 병원 뒤통수에는 대형 장례식장과 엄청난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었다. 

“아유, 여기서 살다가 바로 장례식장으로 직행하면 되겠네. 아주 좋아요.”

남편의 황당한 반응에 중개사와 나는 슬쩍 웃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아파트는 A, B 두 단지로 되어 있는데 아버님은 A단지니까......”

그녀는 온갖 부대시설과 의무식에 대한 설명까지 다 마친 후에야 일어섰다.      


처음부터 작정한 남편은 바로 계약을 진행했고 한 달 뒤 우리는 입주했다.      




나도 이 실버아파트가 아주 뛰어난 실버 맞춤형이란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제일로 꼽는 것은 아파트보단 ‘먹산’이다.


‘먹산’은 우리 아파트 등허리 쪽을 두르고 있는 산줄기의 정상에 있는 산이다. 

산줄기의 중간쯤을 깨뜨려 새로 지은 아파트가 우리 실버아파트였다. 그래서 아파트 어디서든 산이 보였고 등산을 하기에도 접근성이 아주 좋았다. 민원이야 어떻든 간에.

그런 점 때문에 건설사에서 이 산줄기 중 얼마를 내놓으라고 지자체에 협박하고 꼬드기지 않았나 싶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이 산은 실버아파트에 딱 맞는 산이었다. 산세가 순하고 흙의 성질도 착해 걸을 수 있는 노인이면 등산이 가능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230M가 채 되지 않는 산은 내 걸음으로 왕복 1시간 반이면 충분했다. 그렇다고 대머리 산도 아니고 짙은 솔숲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늙었지만 품위 있는 산이었다.      


‘먹산’이라는 이름은 내가 부르는 이름이다.  

멀쩡한 세 음절짜리 제 이름이 있긴 하지만 맘에 들지 않아서 바꿨다. 그래도 그중 비슷한 모음 한 개를 가져와서 지은 이름이니 산도 마냥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산에 오면 먹의 은은한 향과 순전한 무채색이 느껴져서 그 이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산이 시커멓단 얘긴 당연히 아니다.  

그나마 ‘먹산’이라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아마 나 혼자일 것이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누구도 산 이름을 묻지 않는다. 그냥 ‘산’이라고 말할 뿐이다.     


물론 먹산이 이 아파트의 재산은 아니지만 거의 이 아파트 주민들이 독점하고 있다. 

언제 가도 서너 명의 노인들을 만날 뿐 길이 한적하다. 새벽에도, 낮에도, 초저녁에도 그 정도다. 등산로가 붐비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리고 먹산은 언제나 평안하고 아름답다.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이나 눈으로 나뭇가지가 꺾이는 겨울이나 먹산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아주 가끔씩 앓을 때가 있긴 하나 곧 아무렇지 않았다. 더욱이 매일 새 단장을 하는 듯 조금씩 다르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래도 산인데 위험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주워들은 얘기로는 등산용 지팡이 하나면 충분했다. 때로 유기된 개가 나타난다고도 하고 우리를 탈출한 아기 곰이 있을 수 있으니 지팡이를 휘두를 수는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지팡이를 휘젓는다고 그 짐승들이 도망갈지는 알 수 없으나 얼마 전 커다란 유기견을 만난 분의 체험담이니 믿는 수밖엔 없었다. 

또 비가 오고 나면 제 구멍을 찾아가지 못한 뱀이 있기도 하니 땅을 탁탁 치며 걸어야 뱀이 알아서 숨어 버린다고. 고라니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고라니는 제가 먼저 놀라서 도망가니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도 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다 노인들이어서 걷는 데만 진심이라 딴생각 품을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 산인가.      




이렇게 이름도 제 마음대로 지은 먹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아파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실버아파트의 노인들은 대부분 아파트와 먹산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들이나 나나 삶의 범위가 그렇다. 

그리고 아직 그 범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초짜 실버인 내가 많은 시간 위안을 얻어 온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앞으로 써 나갈 이야기들이 실버의 시간에 막 들어선 이들에게 조금은 낯익은 미래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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