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던 날
“여기다 차 세우시면 안 돼요.”
등판에 보안팀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색 조끼를 입은 앳된 청년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이삿짐이야. 보면 몰라? 저기 10층인데 그럼 어디다 세우라고?”
이삿짐 사장은 아무 말이 없었고 같이 온 묵직한 직원이 냅다 소리 질렀다.
5월이었지만 누구 탓인지 환장하게 더운 날이었다.
“여긴 소방차가 들어와야 하는 곳이라 안돼요. 얼른 빼세요.”
청년은 얼굴까지 창백해지며 반말을 해대는 직원 앞에서 헉헉거렸다.
“아, 뭐 이런 데가 있어. 그럼 사다리차를 쓰지 말라는 거야 뭐야?”
그 사이에 사다리차가 슬금슬금 도착했고 청년은 뺑소니치듯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니 실버아파트는 맨날 불만 나나? 어떻게 저 이삿짐을 다 엘베로 날라?
아파트 이사를 몇 번째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사다리는 거실 유리창 쪽에 장착되고 짐이 올라올 무렵 아까 그 청년이 이번엔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안된다니까요. 당장 사다리 내리세요.”
아무래도 좀 이건 아니다 싶어 남편이 나섰다. 책임자 연결하세요. 제가 연락할 테니.
청년이 와다다다 찍어주는 전화로 남편이 몇 마디 하자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곳은 실버 아파트라 언제 비상사태가 생길지 모르므로 소방차 구역에 주차를 하는 것은 불법이나 이미 사다리를 장착했으니 신속하게 이사하시고... 어쩌고.
별 일이 다 있다 싶은 개운찮은 마음으로 올라오는 짐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까의 반말 직원이 푹 주저앉았다.
‘이것은 또한 무슨 일?’
휘둥그레진 내 눈에 조금 놀란 사장은 아무렇지 않게 직원이 당뇨가 있다고 했다.
맙소사! 일은 고사하고 바닥에서 헐떡이는 가엾은 직원이 죽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도대체 사장은 무슨 생각으로 당뇨 직원을 데리고 왔단 말인가. 참으로 다사다난하다.
서둘러 묶음으로 올라온 생수를 당뇨 직원 옆에 갖다 놓고 뭐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그는 단 게 있으면 달라고 했다. 새로 이사한 집에 짐도 안 풀었으니 무슨 단 것이 있을까. 더욱이 노인네 둘이서 단 것을 먹을 일은 생일 날 뿐이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 짜증이 즙처럼 땀구멍에서 흘렀으나 어쩌랴.
일단 아파트 내의 편의점에서 초콜릿과 옛날 크림빵, 단팥빵 등을 사 왔다. 잠시 후 당뇨 직원은 소생했으나 그렇다고 씩씩하게 일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집주인 노인 둘과 주방 아줌마 하나가 일을 돕는 수밖엔 없었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사가 한창일 때, 처음 보는 할머니 한 분이 쑥 들어왔다. 얼마나 자연스럽던지 자기 집 같았다.
“아이고, 며칠 정신없이 시끄럽게 꽝꽝 대더니 오늘 이사 왔나 봐?”
허리가 다소 굽었으나 매우 정정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150CM가 될까 말까 한 키와 전체적인 실루엣은 80을 훨씬 넘어 보였지만 백색의 머리숱은 우리 부부보다 많아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긴 나이가 많아지면 어느 순간부터 그냥 무한대 노인이긴 했다.
“아, 예. 그동안 시끄러우셨죠? 에어컨 공사, 줄눈 공사하느라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나는 매우 예의 바르게 대답을 하면서도 의아했다.
40년 결혼생활 중 이사를 숱하게 했고 그 대부분이 아파트였지만 이렇게 모르는 이웃이 쑥 들어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그 당당함이라니. 나는 마치 집주인 앞에 세입자 같았다.
“거, 있잖아? 난 옆집 1004호에 혼자 살아. 아유, 여긴 방이 셋이네. 밝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좋은 집에 이사 왔네.”
할머니는 뒷짐을 진 채 방과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매우 즐거워했다.
물론 난 할머니가 왜 즐거운 지 그 이유를 아직은 알지 못했다.
“여기 좋아. 다 노인네들이라 조용해. 난 밥은 잘 안 먹지만 식당도 있고 편의점도 있잖아. 사우나도 있고. 아줌마는 헬스장 가도 되겠네. 난 그저 산에나 다녀와. 식당은 밥이 맛없어. 밥값까지 합쳐서 받으니까 관리비는 오지게 비싸. 칠보 아파트라서 그래.”
갑작스러운 1004 할머니는 아파트 정보를 순식간에 전수해 주었다.
“칠보 아파트요?”
“응, 아파트 이름이 오죽 길어. 그거 못 외우지. 그런데 이런 델 칠보 아파트라고 한 대 우리 아들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하긴 아파트 이름은 여느 아파트보다 유난히 긴 11음절이었다. 누가 지었는지. 하여튼 난 얼른 얼굴을 가다듬었다.
“아파트 이름이 너무 어렵죠. 그런데 왜 칠보예요? ”
“칠보가 비싸잖아. 관리비가 좀 비싸? 그래서 다 칠보 아파트라고 불러. 내 친구들도.”
“아! 좋은 아파트란 뜻이죠? 할머니.”
일단 긍정적으로 말을 마쳤다. 그래야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할머니는 나처럼 실버라는 단어가 싫어서 실버를 칠보라고 하는지, 아님 실버라는 발음이 안 되는 건지, 혹은 관리비가 비싸서 불만을 에둘러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세 번째라면 나중엔 칠보가 다이아로 바뀔 수도 있겠단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와. 나 혼자 있어.”
할머니는 뒷짐진 채 현관을 나서며 너무나 편안하고 당연하게 처음 본 나를 초대했다.
"예? 아, 어. 저... 아, 예."
언제부터인지 오래되고 낯설어진 문장.
우리 집에 놀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