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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ug 23. 2022

사막의 여우

조촐했던  만남

 아직은 사방이 겨울의 무채색으로 싸여 있을 때, 먹산에는 진달래꽃이 마치 작은 등불처럼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지나치기에는 너무 환했고 유심히 들여다보기엔 다소 단조로운 꽃이었다. 그런데 일단 눈에 띄면 여지없이 소월의 진달래꽃 시가 생각나곤 했다.      


 그 무렵이었다. 노인을 만난 것이.     


 먹산에 내가 오르는 시각은 거의 오후 3시 무렵이었는데 며칠째 정상에서 같은 노인을 만났다. 그는 늘 가벼운 운동을 잠깐 하곤 조용히 내려갔다. 

 대개의 남자 노인들이 그렇듯이 이곳의 노인들도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나도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은 아니었으나 매번 만나게 되는 노인을 모른 척 하기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맘먹고 인사를 했다.      


 “언제나 이 시간에 뵙네요. 매일 오시나 봐요.”     


 노인은 뜻밖이란 듯 선글라스를 잠시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그는 늘 옅은 녹색의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잠시 들려진 선글라스로 밑으로 회색빛의 눈동자가 나타났다간 사라졌다. 


 “예, 늘 3시에서 4시 사이에 올라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노인이 연희동에서 오래 살다 온 것과 그 동네에서 선생을 오래 했다는 것. 그리고 살던 동네의 뒷산을 오르던 습관으로 계속 먹산에 온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선생이었단 말에 나는 마치 학생 인양 부담 없이 소월의 진달래꽃을 주절거렸다. 


 나라면 절대로 진달래꽃을 연인의 가는 길에 깔아놓는 짓은 안 할 것이며, 그 따위의 시를 쓴 소월은 남성우월주의의 대표주자가 아니냐고 떠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달래꽃의 화자(話者)가 꼭 여자라고 볼 수는 없지 않아요?”     


 내가 잘난 체하며 이야기하자 3시의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던진 말이었다.      

 가만, 국어 시간에 배울 때 그렇게 배우지 않았나? 물론 잘 기억나진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꽃을 뿌려놓은 게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사뿐히 즈려밟고 가는 사람이 왜 남자라고 생각했을까? 여자일 수도 있잖아. 에구 창피해라.     

 머쓱해진 나는 말머리를 돌려서 어린 왕자 얘길 꺼냈다. 선생이었다니 이 정도는 뭐. 


 나는 어린 왕자를 아주 좋아해서 몇 번씩 읽었는데 원서는 읽을 수가 없었다는. 내가 다니던 학교는 제2외국어 따위는 없던 실업계였단 얘길 했던 것이다. 그러자 3시의 노인은 또다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원서로 읽으면 발음의 맛이 있기는 하지만, 번역도 훌륭합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아니 선생님이셨다더니 불문학이요?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우! 우리 아파트는 식자(識者)와 무식(無識) 자가 절반씩 섞여 있어서 뭐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는 욕먹을 얘길 어떤 할아버지가 마구 떠들더니, 그 식자가 이런 분인가 보네.’      

 

 내게는 만남이 희귀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기에 3시의 노인에게 집중했다.     


  3시의 노인은 그렇게 나와 어린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꽤 많이 했다. 그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노인도 나도 그 부분에서 서로 공감하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어린 왕자 이후로는 별로 긴 이야기를 하는 일이 없었다. 나의 무식함으로 인해 함께 나눌 주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눈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반복되었다.     

 

 그렇게 날이 지나면서 나는 산의 정상에 오르면 3시의 노인을 만나는 것이 당연했다. 3시에서 4시 사이면 노인이 와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 지나갔고 진달래가 다 질 무렵, 어느 순간부터인가 난 3시의 노인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노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3시에서 4시 사이에 와야 하는 노인은 오랫동안, 거의 한 달 이후에도 오지 않았다. 

 글쎄 오지 못했는지 모른다.      


 편찮으신가? 아파트 옆구리의 대형병원에 입원하셨나? 돌아가셨나?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3시의 노인은 갑자기 아플 수도, 갑자기 입원할 수도, 갑자기 돌아갈 수도 있는 충분한 나이였고, 우리 아파트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허전함의 꼬리는 제법 길었다.      

 

 먹산 소나무 기둥에 포스트잇이라도 붙여야 할까?     


 ‘혹시 연녹색 선글라스를 쓰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는 회색 눈동자의 노인을 만나면 알려주세요. 

   -사막의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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