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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Aug 25. 2022

제2차 밥 전쟁

실버 아파트에서 밥은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는 식당을 보고 입주한 분들이 많았기에 더욱 그랬다.      


나도 결혼 전에야 먹든지 굶든지 내 맘대로였지만 식구가 딸리고 보니 밥은 인생의 필수템이 되었다. 더욱이 시골에 계시던 시부모님이라도 방문하시면 새벽부터 아침상을 봐놓고 출근했던 빌어먹을 슈퍼 우먼 신드롬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니 밥 얘기만 나오면 일종의 트라우마가 발동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식사를 대강하고 그나마 한 끼는 건너뛸 때도 많았다. 그렇다고 은퇴해서 종일 같이 있는 남편에게 너도 나처럼 드세요라고 하기엔 아직 내공이 부족했다. 

하긴 남편도 이제는 늙은 내게 세끼 밥을 ‘얻어’ 먹기는 미안하다고 했다. 

남편이 이 아파트를 선택한 이유도 1년 내내 세끼 밥이 제공되는 식당 때문이었다.       


나는 대개 점심때는 남편을 식당으로 보냈다. 남편은 반은 자발적으로 반은 강제로 점심을 식당에서 해결했다. 그래도 별 말없이 꾸역꾸역 점심을 먹고 오곤 했다.      

그런데 식당 밥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정적인 이야기가 떠돌았고 식당은 엄청난 누적 적자로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아무도 안 믿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식당 앞에 떡하니 대자보가 나붙었다.      

물가 상승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밥값을 인상해야 하니 설문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아주 평범했다. 설문이야 조사할 수 있는 것이니까.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플레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때였고, 당연히 모든 것이 올랐다는 것은 노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식당 측의 설문지라는 것이 개가 웃을 노릇이었다. 예를 들기도 민망하나 이런 식이었다.      

        

 식비 인상 10***원 (  ) / 식비 인상 12***원 (  ) 

 두 가지 중에 선택해 주세요.       


말하자면 조금 올릴까? 좀 더 많이 올릴까? 선택하라는 얘기였다.


차라리 솔직하게 식비를 10*** 인상하게 되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애들 장난도 아니고 둘 다 올릴 건데 어디다 동그라미 칠래?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소수 노인(입주민의 1/7 정도?)’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화가 충천한 그들은 전쟁을 선포했다.      


이 따위 설문지가 어디 있나? 마치 김밥 집주인이 2000원짜리 김밥을 3000원 내고 먹을래? 4000원 내고 먹을래?라고 손님에게 묻는 거 아냐? 김밥은 싫으면 안 사 먹으면 되지만 여긴 의무식 아냐? 한 달에 무조건 먹어야 되는 끼니가 있는데, 뭐? 조금 올릴까요? 많이 올릴까요? 이런 건 다 반대해야 돼. 인상을 반대한다는 설문은 왜 없어? 여러분들, 설문에 응하지 마세요. 그리고 기준이 뭐냐고?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한 거라고? 그놈들이 우리 대표야?      


그놈들이 우리 대표인 것은 맞다. 


실버아파트엔 운영위원회라는 게 있는 데 그중 몇 명이 입주민이다. 그러니 대표는 대표지. 그런데 대표가 대표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거수기라는 게 ‘소수 노인’들의 의견이었다. 나도 ‘소수 노인’들로 이루어진 채팅방에서 아파트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들여다보긴 하는데 안팎으로 답답한 일이 많아 보였다.      


    ‘이 참에 입주민 모두가 식사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식당을 점거하고 농성할 수도 없는 겁니까?’ 


최첨단 다혈질이거나 과격한 노인들이 채팅방에서 발언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호응이 없었다.

대부분의 노인들에게 밥은 너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할머니 한 분이 식당 앞에서 ‘저 놈들이 노인네들 밥 굶기려고 밥값 올리지 말라고 한다’는 서글픈 시위도 있었다고.     


당연히 승리한 식당은 설문 결과의 대자보를 붙였다. 사족을 달아서.     


‘12***원으로 하자는 입주민도 있었으나 10***원 쪽이 좀 더 많아서 이리 결정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똥을 싸라, 미친놈들”

고상하게 늙은 키 크고 자세가 빳빳한 할머니가 낮게 욕을 하며 지나갔다.      


식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지금이 2차 밥 전쟁인 것은 1차가 있었단 얘기다. 1차 때는 분양할 때 제시한 가격보다 입주할 때 가격이 이미 올라 있어서 전쟁조차 하지 못했다고. 그때도 좀 시끄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전쟁을 하나 안 하나 결과는 같고, 3차 밥 전쟁이 일어나도 결국 “we shall overcome"을 노래하지 않을까 그들은.     


이러한 일련의 소소하지만 개같은 사건들은 나를 조금 더 실버 아파트 부적응자로 만들었다. 


오늘도 남편은 대폭 오른 밥값을 입주민 카드에서 공제한 점심을 먹고 왔고, 난 집에서 라면을 먹었다. 

그런데 남편은 아무 불평이 없고 나만 불편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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