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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Sep 02. 2022

국가주의와 대벌레


여름내 먹산을 오르는 길에는 대벌레가 무성했다. 

초록색 이쑤시개 모양의 긴 몸통에 가느다란 다리가 달려있는 가냘픈 이 생명체는 외래종이라고 했다.      

이 벌레는 나무기둥이나 등산로 목책에 주로 있었는데 가끔씩 나무 위에서 후드득 떨어져 땅에 착륙하기도 했다.

 대벌레의 초록색은 여름이 깊어지며 갈색으로 변했고 그땐 나무 기둥 색과 아주 비슷해서 그냥 나무 같았다.      

‘너도 늙으면 색이 변하는구나. 뭘 더 살아남겠다고 보호색을 쓰나?’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내 눈엔 갈색 대벌레가 그렇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산 중턱에서 세 명의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들 중 매우 건장해 보이는 할머니가 대벌레를 마구 잡고 있었다. 

얼마나 풍채와 태도가 당당한지 마치 전장의 장군 같았다. 장군 할머니는 등산용 지팡이로 대벌레를 떨어내거나 나무에서 즉사시키는 정도를 떠나서 손으로 직접 잡아내고 있었다. 


“아이고, 독하다. 약을 한 번 해주던지 해야지 원. 맨날 잡아도 그 타령이네.” 

    

먹산을 오르는 많은 노인들이 지팡이로 대벌레를 잡는 것은 보았지만 손으로 집어내는 것은 처음이라 난 잠깐 놀랐다. 할머니의 발 주위에는 수많은 대벌레가 나둥그러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난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럴 땐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게 맞지. 즉시 내 옆 나무를 열심히 기어오르던 대벌레를 툭 쳐서 떨어뜨렸다.   

   

“아, 네. 저도 보이는 대로 죽이기는 하는데... 손으로는 못 잡겠네요.”     


그러자 그 건장한 할머니는 나를 주룩 훑어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유, 난 늙었으니까 손으로 잡지. 아직 젊잖아. 그래도 대벌레에 관심이 있네요. 어떤 영감탱이들은 벌레가 있는지, 잡아야 되는지, 내가 뭘 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어. 도대체. 트로트만 신나게 틀면서 지나가면 다야? 산엘 오면 산을 좀 지켜야지.”    

 

장군 할머니는 체격에 어울리게 목소리도 우렁찼다.


산을 오르며 할머니가 앞서 대벌레를 소탕하며 나갔기 때문에 내가 처리해야 할 벌레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눈을 부릅뜨고 나뭇가지를 살피고, 위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벌레들은 피해 가며 산에 오르려니 매우 더뎠다.      

“양반은 못되네. 저 영감들이야. 입만 살았지 벌레 한 마리도 안 잡는 위인들이.”   

  

우레 같은 할머니 소리에 눈을 들어 보니 산 정상 운동 기구 쪽에 서너 명의 할아버지들이 땀을 식히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소리 같았으나 확실히 대화였다. 하긴 산 정상에 오를 정도의 체력을 지닌 할아버지들은 매우 건강했다.   

   

그런데 들려오는 이야기는 기이했다. 

 3.1절에 왜 태극기를 안 다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사는 A단지가 너무 태극기를 안 달아서 창피하다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곳에서 나도 태극기를 단 적이 없었다. 일부러 안 단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달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인데 그게 우리 A단지 할아버지를 창피하게 했던 것이다. 맙소사!


또 다른 얘기는, 나라 안이 외국인들 천지라서 걱정이라고.  우리는 단일민족 아니냐고. 

그렇지 백의민족이지. 다른 할아버지가 맞장구쳤다. 얼씨구!

월남전과 사우디 건설현장과 IMF의 폭풍 사이를 거칠게 누벼온 그들의 주제는 요즘 젊은이들이 나라 위해서 일하기는커녕 고마운 줄도 모른다는 결론으로 사이좋게 나아가고 있었다. 와우!


그중 비교적 가냘픈 몸매의 할아버지가 가끔씩 반박을 하는 듯했으나 곧 박살 나는 모양새였다. 

“에이, 그게 할 소리야?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는 거지.”

가냘픈 할아버지는 대개 이 문장에 침묵했다.     

 

오! 과연 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게 맞았다!     


“영감님들, 대벌레를 잡아야 나라도 있는 거요. 산에 이렇게 매일 오르면서 저 해충을 한 마리라도 잡아봤어요? 나라가 산이고 산이 나라지 뭐. 산이 다 망가져도 나 몰라라 할 거요?”     


드디어 나의 장군 할머니가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들은 일제히 독립투사 같은 할머니를 주목했다. 


할머니는 나무 사이에 세워져 있던 내 키 만 한 싸리 빗자루를 들고 와 나무 기둥을 훑어가며 벌레를 떨어내고 있었다. 정상에는 그만큼 벌레가 더 많았다.      


“벌레는 나라에서 잡아줘야지. 약을 쳐 주던가. 노인이 무슨 힘이 있어?”

할아버지 한분이 감히 할머니에게 말대꾸를 했다. 

     

“여기서 떠들 힘 있으면 100 마린 잡겠네요. 뭐 곰을 잡으라는 것도 아니고 힘은 무슨.”  

할머니 주변에는 나무에서 단체로 떨어진 대벌레들이 마술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할머니 파이팅!’


할아버지들의 대화를 완전히 끊어버린 할머니를 응원하며 나는 조용히 산을 내려갔다.     

 

내 뒤통수로 방금 호통 치던 장군 할머니와 애국자 할아버지들이 함께 웃으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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