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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Sep 05. 2022

자세히 보면 다르다

 나는 시폰으로 만들어진 블라우스나 원피스를 좋아한다. 마치 매미 날개처럼 아른거리는 그 느낌을 젊어서부터 좋아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시폰 옷감의 옷을 사지는 않았다. 아른거리는 매력만큼 천이 얇아서 속옷을 견고하게 갖춰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덥고 불편한 것을 감수하고 입을 만큼의 열정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이곳 실버아파트에서 시폰 원피스를 입은 사람을 보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어쩌다 로비나 식당에서 우아한 할머니가 시폰 원피스를 입고 걷는 것을 보면 난 잠깐 나도 모르게 주목하곤 했다. 


‘이야. 역시 시폰은 예뻐. 저 할머닌 멋쟁이네.’    

 

내가 입진 못해도 남이 입은 것을 보는 것도 일종의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난 멋진 할머니들이 지나가면 달려가서 계속 패셔너블하게 입어 주십사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진 못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이곳에서의 패션은 많이 비슷하단 얘기다. 

할머니들은 머리 길이와 곱슬 정도와 얼굴과 키와 옷까지도 참으로 닮았다. 

심지어 눈의 크기나 웃는 모습도 비슷해서 사람 구별 잘 못하는 나는 누군가를 알아보는 데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다. 그중에 압권은 마스크였다. 마스크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비밀병기였다. 


그렇고 그런 아주 닮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던 중 어느 날이었다.    

  

우리 층 엘리베이터 앞이 소란했다. 우리 동의 엘리베이터는 한 층에 3개가 있는데 그중 두 개는 같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노인들이 엘리베이터를 잘 못 타는 일은 일상이었다. 그날도 누군가 또 잘못 타셨구나. 그런 생각으로 지나치는데 좀 시끄러웠다. 


붙어 있는 두 개의 엘리베이터 중 한쪽에 들어간 할머니와 밖에서 그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좀 젊은 할머니 때문이었다. 그러니 엘리베이터의 문은 닫히지 못하고 드르륵 거리며 옆에서 입 퇴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신사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이었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구경하는 나를 빼고는.     

밖에서 애원하듯이 할머니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젊은 할머니는 아마도 딸인 듯했다.

그녀는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보기에도 고가인 시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원피스 겉으로 복대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곱게 늙어 아직도 어여쁜 그녀였지만 허리가 안 좋은 나이였다. 


“엄마, 가시면 안 돼요. 아버지한테 가야지 어딜 가는 거야.”


딸에게 팔을 잡혔지만 안에 들어간 할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따스한 눈길로 할아버지를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다소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그냥 이 상황을 견디는 분위기였다.


“할아버지, 이 할머니 아세요? 모르신대잖아. 엄마 집은 여기가 아니고 저기로 가야 된다고.” 


늙고 예쁜 딸은 계속 할머니에게 얘길 하고 있지만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황을 보니 할머니는 엘리베이터의 할아버지를 당신의 남편으로 착각하고 따라 탄 것 같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의 할아버지는 분명히 뇌세포의 이상에서 나온 이 할머니의 행동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할머니에게 손이 잡힌 할아버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여전히 견디고 있었다. 참으로 멋진 할아버지였다.


“아유, 알았어요. 알았어.”


결국 복대를 한 시폰 원피스의 딸이 엘리베이터 속으로 함께 들어갔다. 다행이었다.     

그 광경을 본 몇몇 노인들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는 표정으로 지나갔다. 


그곳에서 나도 미래의 내 모습을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지만 바스러질 것 같이 하늘거리던 연보랏빛 시폰 원피스가 망막에 남아 잠깐의 한숨을 잊어버렸다.   

   

늙어도 예쁨에 대한 미련은 늙지 않는 것일까. 그 딸에게나 나에게나. 

또 내가 똑같다고 생각했던 다른 할머니들도?      


아, 그렇구나. 왜 몰랐을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보는 시선이 ‘할머니들은 다 똑같아’인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참으로 황당하고 막돼먹은 자의식만 내뿜으며 살았구나. 

부끄러웠다.   

  

앞으론 절대 ‘할머니들은 다 똑같아’라고 생각하거나 얘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세히 보면 그들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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