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은 이른 아침부터 당분간 집을 비울 것을 대비해 집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먼저 세탁기를 돌리고 냉장고에서 상할 것 같은 음식을 치웠다. 모아 둔 재활용품도 가져다가 분리해서 배출했다. 바닥을 빗자루로 쓴 다음 물걸레로 빡빡 닦았다. 진공청소기가 있지만 속이 시끄러울 때는 빗자루질과 물걸레질만 한 게 없었다. 바닥 청소를 마치고 나니 등에 땀이 배어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었다. 세탁이 끝난 옷들은 발코니에 건조대를 펴고 널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옷들이 보송보송 잘 마를 것 같았다.
선영은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은 터라 배가 고팠다. 점심은 현정이와 먹기로 했다. 그때까지 커피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래야 할 것 같았다. 블랙커피 한 잔을 타서 소파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면서 한결 깔끔해진 실내를 둘러보고 ‘청소한 보람이 있네’ 하고 생각했다. 비록 어깨가 뻐근하고 허리가 아프긴 해도 복잡한 생각을 몰아내는 데에는 청소만큼 좋은 게 없었다.
“아 차!”
선영은 고모에게 전화하는 걸 잊고 있었다. 고모의 이름은 미자였다. 미자는 선영에게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선영의 부모는 선영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통사고로 한날한시에 사망했다. 그 후로 선영은 5년 전 미자가 구례로 내려갈 때까지 줄곧 미자와 같이 살았다. 서울에서 미자는 본인의 세례명을 딴 안나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하며 직접 만든 빵과 쿠키, 그리고 커피와 차를 판매했다. 미자는 환갑이 되면 조용한 시골에서 명상 센터와 다도 체험 교실을 하며 살고 싶어 했다. 운 좋게도 그녀는 환갑도 되기 전에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섬진강 인근에 매물로 나온 초등학교 분교를 사들인 것이다. 다도 체험 교실이나 명상 센터를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거기에서 나온 수입으로 먹고살기엔 턱없이 부족할 터였다. 그러던 참에 펜션을 운영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지인의 권유를 받았다. 지자체의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숙박에 적합하도록 내부 수리를 한다면 펜션을 해도 근사할 거라고 판단했다. 미자는 생각 끝에 펜션을 운영하기로 하고 거기에 맞춰 건물 안팎을 단장했다. 펜션 이름은 ‘거북이’라고 지었다. 토끼처럼 숨차게 달리기만 했던 도시 생활을 잠시 멈추고 거북이처럼 조금은 느릿하게 자신을 돌보는 곳이란 의미였다.
다도와 명상 체험은 펜션 이용자들의 예약을 받아 운영했다. 이용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정원과 운동장이었다. 정원은 양탄자처럼 푸른 잔디로 덮여 있었고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라고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는 분수가 하늘로 치솟는 작은 인공 섬이 조성되어 있었다.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를 즐길 수 있었고 한쪽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기구들도 있었다. 펜션에서 조금 걸어가면 섬진강이 있어 산책하기에도 좋았다.
미자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일이 많았다. 근처에 사는 관리인 노부부가 있긴 해도 손님들이 먹을 빵과 쿠키를 굽고 체험 교실을 운영하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두 달 전, 설 연휴 때 선영이 머무는 동안에도 가족 단위 손님들이 있었다. 선영이 바쁜 미자를 걱정하자 미자는 바빠서 오히려 건강해졌다며 시골 생활에 매우 만족해했다.
미자의 전화가 꺼져있어 곧장 음성 사서함 안내가 나왔다. 오후에 다시 전화하기로 하고 문자를 남겼다.
-고모, 저 내일 구례에 내려가요.
선영은 점심시간에 맞춰 현정과 만나기로 한 파스타 전문점에 갔다. 현정이 오자마자 먹을 수 있도록 파스타를 미리 주문했다. 잠시 후 현정이 도착했다.
“어서 와, 내가 주문은 미리 했어.”
“잘했어. 일찍 나오려는데 인쇄소에서 전화가 와서 좀 늦었어.”
“괜찮아. 난 시간 많아.”
“시간이 많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현정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사실 나 출판사 그만뒀어.”
“뭐라고? 말이 돼? 네가 차린 출판사를 그만두게?”
현정은 선영이 괜히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못 믿겠지만 사실이야.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너한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야.”
현정은 선영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선영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봤다.
“너 진짜구나. 무슨 일 있는 거야?”
현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안 해도 돼. 어디 아파서 그런 건 아니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만둘 이유가 없잖아. 주호 선배랑 결혼하고 집에서 살림할 것도 아니고.”
“그럼, 파스타 나오기 전에 빨리 말할게. 사실 나 주호 오빠랑 헤어졌어.”
“뭐라고? 그걸 믿으라고?”
“무슨 말인 줄 아는데, 사실이야. 안 그러면 내가 출판사를 그만둘 이유가 없잖아.”
그때 주문한 파스타가 나왔다. 현정은 여전히 선영을 바라볼 뿐이다.
“시간 없잖아. 일단 먹은 다음에 이야기하자. 아침부터 대청소했더니 배가 고프네.”
선영이 포크로 면을 돌돌 말면서 말했다. 현정은 대수롭지 않은 척하는 선영이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그래, 어서 먹어. 배고프겠다.”
현정도 포크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선영과 현정은 식사 후 테이크아웃 전문점에서 커피를 사서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았다.
“나는 점심 먹고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 자주 와. 골목 안쪽에 있는 공원이라 사람들도 많이 없고.”
현정이 공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땅값 비싼 동네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네.”
선영도 커피를 마시면서 공원을 둘러보았다.
“그렇지? 여기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시면 피로가 풀린다니까.”
현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둘이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거. 사실은 …… 그렇게 된 거야.”
선영은 그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주호 선배가 그럴 수가 있어? 다른 남자들이 다 바람을 피워도 주호 선배만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현정은 몹시 실망스러워 미간을 찌푸렸다. 현정은 주호가 유쾌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호와 선영이 함께 일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그랬던 주호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니, 그것도 선영이 아는 여직원이랑. 주호가 다른 여자와 있는 장면을 선영이 목격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생각하니 현정은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날씨는 화창한데 커피가 유난히 썼다.
“그래서 말인데 나 당분간 구례에 내려가 있을 거야. 여기서는 정리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그게 좋겠다. 아 참, 고모님은 잘 계시지?”
“어, 잘 지내셔. 바쁘긴 해도 재미있으시대.”
“작년에 남편이랑 갔을 때 보니까 고모님은 그곳이랑 잘 어울리시더라. 경치가 좋아서 그런지 여기서 베이커리 하실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지신 것 같고.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는 나 혼자 고모님 펜션에 가서 며칠 있다 올 생각이야.”
“남편은 어쩌고 혼자 간다는 거야.”
“아, 거기서 글 쓰면 좋을 것 같아서 남편한테 말했더니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다음에 글 쓸 일 있으면 따로 가자고 했지, 뭐.”
“그거 좋은 생각이다. 수창 씨 책방은 잘 되고?”
“너도 알다시피 독립서점이나 독립출판이라는 게 낭만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무지 고독한 일이잖아, 돈도 안 되고. 그런데도 남편이 꼬박꼬박 월세 내는 것 보면 신기해.”
“현정이 네가 항상 응원하니까 수창 씨도 더 열심히 하겠지.”
“그렇겠지. 무엇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포기하지 말고 계속했으면 좋겠어.”
“하다 보면 대박 날 수도 있잖아. 아무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출판 일이니까.”
“책을 계속해서 내려고 글도 꾸준히 쓰고 있으니까 잘되겠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벌면 금상첨환데 말이야.”
“잘될 거야. 이왕이면 수창 씨가 구례에서 쓴 글로 대박 나면 좋겠다. 아무튼 나도 구례에 갈 때마다 며칠 있고 싶어지더라.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읽고 낮잠도 자고 그러다 강변을 따라 산책도 하고, 밤에는 별도 보고 말이야.”
“선영이 넌 그래도 되잖아.”
“그러고는 싶은데 그게 잘 안되더라. 내가 은근히 일중독이거든.”
“나도 이해해. 출판사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겠지. 이왕 시작한 거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테고. 결과적으로 네 덕에 출판사가 빠르게 안정 궤도에 들어설 수 있었던 거지.”
“현정이 네 말이 맞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까 후회가 되더라.”
“후회?”
“내가 너무 일만 한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나는 우리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 좀 고생하자고 그런 건데, 결국 그것 때문에 오빠를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게 한 거잖아.”
“어떻게 그게 네 탓이냐?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린 사람이 잘못이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게 내가 출판사를 빨리 그만둔 이유이기도 해. 뭐가 됐든 더는 일 때문에 놓치며 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러고 보면 살면서 놓쳐야 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게.”
선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참 맑았다.
“구례에는 언제 내려갈 거야?”
“내일쯤.”
“그래, 이참에 충전한다고 생각하고 푹 쉬다 와.”
“나도 그럴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