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은 현정과 헤어져 집으로 오면서도 미자에게 여러 번 전화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휴대전화는 꺼져있었다. ‘펜션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혹시 미자가 숙직실이었던 건물을 수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펜션 부지에는 여섯 개의 교실과 교무실, 과학실, 양호실이 있던 기다란 본관 건물과 그 건물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교감 선생님이 쓰던 관사 한 동, 그 옆쪽으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숙직실로 썼던 작은 건물 한 동이 있다. 본관은 수리를 통해 손님들이 묵는 객실과 식당 겸 휴게실로 변했고, 관사였던 별관은 수리되어 미자가 생활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그런데 숙직실이었던 작은 별관은 외벽만 도색하고 방 2개와 주방 겸 거실이 있는 내부는 아직 수리 전이었다. 미자는 올해 중으로 숙직실 내부도 수리할 생각이었다.
선영은 다시 문자를 남겼다.
-고모, 혹시 숙직실 공사 시작하신 거예요?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요. 저 내일 가요.
선영은 집에 와서 제일 먼저 건조대에 널어둔 빨래를 만져보았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잘 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옷을 탈탈 털 때 나는 소리가 경쾌했다. 마지막 옷을 털 때는 마음에 박혀 있는 날카로운 상념의 가시들이 후드득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털면서 옷에 배인 은은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것도 기분을 좋게 했다. 상쾌한 기분으로 빨래 한 옷들을 차례차례 개켜서 옷장에 넣었다. 귀찮다고 생각했던 빨래라는 행위가 이렇게 큰 기쁨을 준다는 걸 처음으로 안 순간이었다.
선영은 책을 한 권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선영이 최근에 공들여서 출간한 에세이였다.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해 휴대전화로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온라인 서점이나 SNS에 올린 리뷰를 찾아 읽었다. 다행히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자기 손을 거쳐 출간된 모든 책에 애정을 느끼지만, 이 책은 더 특별했다. 주호와 함께 시작한 출판사에서 선영이 낸 마지막 책인 것도 있지만 이 책이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선영은 시간을 할애해 신인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여러 온라인 문학 플랫폼에 연재되는 글을 읽었다. 모두 무명작가가 무료로 연재하는 글들이었다. 그러다 글이 좋아 작가에게 출간 제의를 해서 낸 책들은 특별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도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었다. 무명작가의 글을 책으로 내는 일은 출판사로서는 모험이었다. 잘 될 수도 있는 만큼 잘 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는 책을 낼 때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편집자는 뛰어난 안목이 필요했다. 다행히 선영이 기획한 무명작가의 책들은 타율이 좋은 편이었다. 기존의 인기 작가의 글을 책으로 내면 출판사가 감당해야 하는 위험 부담이 줄었다. 그래도 선영은 무명작가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에서 글 쓰는 작가들이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선영은 무명작가의 좋은 글을 발견할 때는 마치 무수히 많은 모래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듯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선영이 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작업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신지아였다. 선영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아를 마지막으로 본 건 주호의 오피스텔에서였다. 선영이 인수인계하러 출판사에 갔을 때 지아는 보이지 않았다. 선영은 아마도 주호가 자신과 지아를 마주치지 않게 했을 거로 짐작했다. 지아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선영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렇다고 걸려 온 전화를 피할 이유는 없었다.
“여보세요.”
전화는 받았지만 목소리가 평소처럼 산뜻할 수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지아의 시르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구김살 없이 밝은 그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지아 씨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이에요?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거나 대화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팀장님이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당연해요. ……출판사를 그만두셨다는 소식 듣고 너무 죄송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죄송해요, 팀장님. 다 저 때문이에요.”
“다 끝난 마당에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팀장님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제가 팀장님 얼굴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제가 지금 팀장님 댁 근처에 와있어요. 10분, 아니 5분만 시간 내주시면 안 될까요?”
지아는 분명 울먹이고 있었다.
잠시 후 선영은 집 근처 한 카페에서 지아를 만났다. 울먹이는 지아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져서 나온 건 아니었다. 평소에 자신이 아끼던 지아가 자신과 주호의 관계를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주호와 그럴 수 있는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컵에 든 물이라도 얼굴에 끼얹고 싶은 마음, 남의 마음에 상처 내고 잘 사는 사람 없다며 오만가지 저주를 퍼붓고 싶은 마음,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녀를 못 만나나 하는 마음, 이런 복잡한 마음들이 조금씩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깨끗이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지 않으면 미해결된 감정들이 죽을 때까지 무의식 속에 부유할 것만 같았다.
“피차 불편한 자리니까 할 이야기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선영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지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울먹였다. 선영은 그런 지아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지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평소에 팀장님을 보면서 저도 나중에 팀장님처럼 유능한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어요. 그뿐만 아니라 팀장님은 사랑도 성공하셨으니까 더욱 팀장님을 닮고 싶었어요. 그러다 집에서 혼자 있을 때면 버릇이 하나 생겼어요. 팀장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거예요. 마치 제가 팀장님이 된 것처럼이요.”
선영은 지아의 말을 듣고 일순 등이 오싹했다. 저 정도면 스토커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지아 씨,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그래도 거기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건 아니니까 괜찮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저도 모르게 사장님을 자꾸 제 남자친구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장님을 보면 제 가슴이 뛰었어요. 나중에는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사장님을 진짜 제 남자로 만들고 싶어졌어요. 지난 금요일에 제가 사장님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어요. 제가 일부러 사장님을 뒤따라갔으니까요. 사장님이 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저는 그 주변에서 기다렸어요. 그러다가 모임을 끝내고 나오는 사장님에게 아는 체했어요. 친구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사장님을 봤다면서요. 그리고 제가 사장님을 유혹했어요. 호텔이 아닌 사장님 오피스텔로 가자고 한 것도 저였어요. 사장님 휴대전화로 팀장님에게 문자 보낸 것도 저고요. 저랑 사장님이 그러고 있는 걸 팀장님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때는 내가 진짜 팀장님이 된 것 같았거든요.”
“내가 지아 씨를 아끼는 거 알면서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선영은 지아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불끈 치밀었다. 아무리 막장이라 해도 이보다 막장일 수는 없지 싶었다. 불현듯 손에 쥔 물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헛웃음이 났다.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다.
“저도 많이 후회하고 있어요. 제가 사장님을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날 오피스텔에서 뛰쳐나간 팀장님을 뒤따라갔다가 돌아온 사장님이 저보고 회사 그만두라고 하시더군요. 저와 그런 건 단지 일시적인 충동이었을 뿐이고 자신은 팀장님을 사랑한다면서요. 저도 그러겠다고 했어요.”
“출판사에 계속 다니든 아니면 그만두든 지아 씨가 알아서 할 일이지 더 이상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주호 오빠와 나는 이미 끝난 사이니까 지아 씨와 주호 오빠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도 관심 없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팀장님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일이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팀장님.”
“그럼, 할 말 다 한 것 같으니까 그만 일어날게요.”
선영이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고 할 때 지아가 “잠깐만요.” 하면서 선영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사장님 부모님이 꽤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 출판사가 있는 건물도 그중 하나고요.”
지아는 냅킨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래서요?”
선영은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아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지아가 갑자기 씩 웃었다. 그 순간 선영과 지아는 눈이 마주쳤고 선영은 온몸에 냉기가 번졌다.
“나중에는 그 건물들이 다 사장님 소유가 될 텐데, 그래도 사장님을 포기하겠단 말인지 묻고 싶어요.”
“뭐라고요?”
선영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런 지아가 제정신인지 묻고 싶었다.
“아니, 제 생각에 이대로 사장님을 잃는 건 팀장님에게 손해 아닌가 해서요.”
“그래서 지금 나보고 주호 오빠네 부자니까 그냥 넘어가란 말인가요? 지아 씨는 어떨지 몰라도 난 아무리 돈 많은 남자라도 딴 여자랑 자고 다니는 남자랑은 결혼할 생각 없어요.”
선영은 지금까지 지아를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헛소리를 듣자고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선영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명 팀장님은 저랑 사장님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하셨죠? 저는 두 분 잘되시라고 조용히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이제 생각이 달라졌어요. 앞으로 사장님하고 잘해볼 생각이에요.”
“그건 지아 씨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그럼, 먼저 갈게요.”
막장 드라마에서 왜 여주인공이 남편과 바람난 상간녀의 따귀를 때리고 얼굴에 물을 끼얹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선영은 카페를 나오면서 속으로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자, 했다.
선영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아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어쩌면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처음에는 괜히 나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피하지 않고 마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