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선영은 수서역에서 구례행 고속열차에 올랐다. 서울에서 구례까지는 두 시간 사십 분이 걸린다. 구례역에서 거북이 펜션까지는 마을버스나 택시를 타야 한다. 마을버스는 고속열차 도착 시간에 맞춰 운행되고 있어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마을버스로는 30분, 택시로는 15분이 걸린다. 선영의 짐은 캐리어 하나로 단출하다. 선영은 구례에서 한 달 정도 미자와 지낼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좋고 몸도 가볍다. 미자와 전화 통화는 아직이었다. 미자는 선영이 예정에도 없이 눈앞에 나타나면 처음에는 놀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금세 잘 왔다며 기뻐할 것이었다. 언젠가 주호와 헤어졌다는 것과 출판사를 그만둔 것에 대해 말해야겠지만 그때도 미자는 선영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해 줄 것이었다.
열차는 평일임에도 만석이었다. 선영은 캐리어를 선반에 올리고 통로 쪽 좌석에 앉았다. 원래 창 쪽 좌석을 예매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건 통로 쪽 좌석뿐이었다. 옆자리는 아직 비어있었다. 옆자리에 손님이 도착하면 간이 테이블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선영은 일단 읽을 책과 휴대전화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더니 출발 시간까지는 5분이 남아 있었다.
구례에 갈 때는 주로 주호와 함께였다. 주호는 가면서 먹을 간식거리와 음료를 챙겼다. 그뿐 아니라 함께 들을 음악도 휴대전화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왔다. 현정의 말대로 주호는 예의 바르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선영이 주호 차에 탈 때는 항상 차에서 내려 차문을 열어 주었고, 어디 들어가고 나올 때는 주호가 한 발짝 앞에 가서 문을 열고 선영을 기다렸다. 카페에 들어가서도 그는 습관적으로 선영이 앉을 의자를 빼주었다.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영은 그런 주호가 신기했다. 선영의 주위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신기한 것도 당연했다. 나중에 주호의 부모를 만나고 주호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주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매너를 보고 자라서 자연히 몸에 밴 것이었다. 선영이 주호가 더욱 맘에 들었던 건 그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주호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니 선영이 그런 주호에게 설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열차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선영은 주호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앞으로도 이렇게 문득문득 주호가 떠오를 터였다. 알고 지낸 세월이 무려 10년이었으니 그만큼의 추억이 있는 것이었다. 떠오르는 추억을 먼지를 털어내듯 애써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추억도 희미해진다는 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선영은 다음 역까지는 옆좌석이 비어있을 거로 생각하고 앞에 달린 간이 테이블을 펼쳤다. 그 위에 책과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휴대전화에 이어폰을 연결해 귀에 꽂고 책을 펼쳤다. 작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최근 국내에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장르는 소설로 산골 마을에 있는 작은 서점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간이 갈수록 책 유통이 온라인으로 쏠린 상황에서 오프라인 서점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시도 아니고 산골 서점이라니, 관계자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심히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시 소설에서도 서점은 폐업 위기에 내몰린다. 하지만 서점 운영을 맡게 된 젊은이와 베스트셀러 작가의 인연으로 서점이 점차 알려진다. 그 마을에는 매년 1월 등불 축제가 열리는데 그 축제에 온 많은 사람이 산골 서점에 들러 책을 산다. 그 결과 서점은 폐업 위기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이 그곳까지 와서 책을 사는 이유는 그 서점과 서점 운영자의 이야기 때문이라고 선영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대전화 화면에서 터치 한 번이면 살 수 있는 책을 굳이 멀리 떨어진 산골 서점까지 가서 사는 것이었다. 선영은 이미 이 책을 읽었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좋은 책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과 같아서 읽을 때마다 이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선영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래서 선영은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반복해서 읽는 걸 좋아했다.
“저, 죄송한데 안쪽으로 좀 들어가겠습니다.”
키가 훤칠한 남자가 선영의 바로 옆에 서서 말했다.
“아, 네.”
선영은 뒤늦게 나타난 옆자리 승객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서둘러 간이 테이블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선영의 손에 들려진 휴대전화가 바닥에 쿵 하고 떨어져 앞좌석 밑으로 사라졌다. 그때 서 있던 남자가 빠르게 엎드려 앞좌석 밑을 들여다보더니 무릎을 꿇고 손을 쭉 뻗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남자는 휴대전화 액정 화면을 자기 옷에 쓱쓱 닦고 다시 화면을 보더니, “괜히 저 때문에 휴대전화 화면에 흠이 생겼는데 어쩌죠?”라고 말했다.
“아, 괜찮아요. 제 잘못인데요, 뭐. 휴대전화를 주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영은 남자가 건네는 휴대전화를 받아 들면서 말했다.
“별말씀을요.”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이어서 선영도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간이 테이블을 다시 펴서 휴대전화와 책을 올렸다.
“혹시 강 팀장님?”
옆에 앉은 남자가 선영을 보면서 말했다. 선영은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누구?”
“저, 신재하예요, 팀장님.”
“어머,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선영은 2년 만에 본 재하를 몰라볼 뻔했다.
“이야, 이렇게도 만나게 되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재하는 오랜만에 본 선영이 몹시 반가웠다.
“네, 작가님도 잘 지내셨어요?”
“저야 잘 지내죠.”
“작가님 머리 스타일이 달라져서 작가님인지 못 알아봤어요.”
“아, 제 머리가 좀 짧죠. 시골에서는 이런 스포츠머리가 편해서요.”
재하는 한 손으로 자신의 짧은 머리를 뒤로 훑으며 웃었다.
“시골이요? 작가님 서울에 계신 거 아니에요?”
“아, 작년에 서울 생활 정리하고 구례로 내려갔어요.”
“구례요?”
“네, 구례가 제 고향이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팀장님은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저도 구례에 가요.”
“팀장님도 구례에요? 와,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근데 구례에는 어쩐 일로 가시는 거예요?”
“아, 고모가 구례에서 펜션을 하시거든요.”
“펜션이요? 구례에 펜션이 많지 않은데, 혹시 펜션 이름이 어떻게 돼요?”
“혹시 거북이 펜션이라고 아실지 모르겠네요.”
“당연히 알고 말고요. 같은 마을에 있는데 모를 수가 없죠. 더구나 제가 2학년 때까지 그 초등학교에 다녔는걸요. 이야, 신기하네요.”
“정말이요? 그럼, 저희 고모도 아세요?”
“아니요. 아직 뵌 적은 없어요. 제가 펜션 앞으로 자주 지나다니는데 그때마다 펜션 정원이 워낙 예뻐서 안을 들여다보고 가거든요.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요.”
“예전에 초등학교였던 곳이라 그런지 정원을 잘 꾸며났더라고요.”
“어딜 가도 그렇게 잘 가꾼 정원을 보기가 쉽지 않아요. 근데 요즘에는 펜션 영업을 안 하는 것 같던데요.”
“그럴 리가요. 작가님이 잘못 보셨을 거예요. 고모가 펜션만 하는 게 아니고 다도 체험이랑 명상 수업도 하셔서 계속 바쁘세요.”
“그래요? 그럼, 제가 잘못 봤나 봐요.”
“그건 그렇고 작가님은 계속 글 쓰고 계시죠?”
“그럼요. 글 쓰면서 살려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글 써야죠. 헤헤.”
“그러셨구나. 좋은 글 기대할게요.”
“안 그래도 가을쯤에 팀장님에게 연락할 생각이었어요. 그때쯤 다음 책 원고가 마무리될 것 같아서요.”
“이야, 그럼, 이번에 책을 내면 세 번째네요. 두 번째 책도 워낙 평이 좋아서 다음 책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많을 거예요.”
“다 팀장님 덕분이에요.”
“제가 뭘 했다고요. 다 작가님이 글을 잘 쓰셔서 그런 거죠.”
“그때 팀장님이 출간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베스트셀러는 꿈도 못 꿨을 거예요. 사실 저는 블로그에 글만 쓸 줄 알았지, 책 낼 생각은 못 했거든요. 그러니 다 팀장님 덕분이죠.”
“작가님의 일상이 담긴 글을 읽다 보면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건지 생각하게 되고, 하루하루를 좀 더 유의미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더라고요. 편집자 이전에 구독자로서 저는 작가님 글이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출간 제안도 한 거구요.”
“좋게 봐주셔서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지금 글을 쓰는 것도 다 팀장님 덕택이에요.”
“벌써 작가님 다음 글이 궁금해지네요. 어서 빨리 가을이 됐으면 좋겠어요.”
“하하하, 감사해요, 팀장님.”
선영이 주호와 함께 시작한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기획한 책이 재하의 에세이였다. 주호의 염려가 있었지만, 선영은 재하의 글에 확신이 있었던 터라 밀고 나갔다. 출간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출판사를 방문한 재하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선영은 재하의 글을 통해 재하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아 늘 자신과 싸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영은 재하가 최대한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었다. 그 덕분에 재하는 서서히 긴장이 풀렸고 선영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러면서 꽤 오래 대화를 나눴다. 재하는 그런 선영이 참 고마웠고 기회가 되면 다음 책도 선영과 작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결과 두 번째 책까지 냈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재하에게 있어 선영은 늘 고마운 사람이었다.
재하는 대화 도중 “구례에서 살기 어때요?”라는 선영의 질문에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선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재하의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했다. 재하는 휴대전화 화면에서 유튜브 로고를 눌렀다. 곧이어 두세 번 빠르게 터치한 후 휴대전화를 선영에게 내밀었다.
“여기에 있어요.”
재하가 쑥스러워하며 화면을 가리켰다.
“네? 뭐가요?”
선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화면을 들여다봤다.
“작가 노트?”
선영이 유튜브 채널 이름을 읽었다.
“이거 제가 운영하는 채널이에요.”
재하는 여전히 쑥스러워하며 씩 웃었다.
“정말이에요? 이야, 작가님, 대단하시네요. 유튜브 채널 운영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선영은 화면을 보다가 구독자 수를 발견하고 “우와, 구독자가 벌써 3천 명이 넘어요.”라고 말하며 놀라워했다.
화면을 아래로 내리며 동영상을 살펴보았다. 동영상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재하의 시골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 속 심리학’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었다. 선영은 재하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작가님 얼굴도 나오는 거예요?”
선영이 시선을 화면에 두고 물었다.
“네. 일상 브이로그 찍을 때는 괜찮은데 혼자 카메라 보고 앉아서 진행하는 ‘일상 속 심리학’ 영상 찍을 때는 너무 어색해서 진땀이 날 정도예요. 하하하.”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팀장님. 촬영한 영상을 편집할 때 잔뜩 긴장한 제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니까요.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다시 촬영하는데 어떨 때는 재촬영하느라 며칠씩 걸린 적도 있어요.”
“짐작이 가요. 그래도 그렇게 만들어진 동영상을 보면 뿌듯하실 것 같아요.”
“그렇더라고요. 저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요즘에도 강연 요청 자주 들어오죠?”
“아, 그거요. 강연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지만, 가끔 초대받고 가서 ‘일상 속 심리학’이라는 주제로 제가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나 일상에서 심리학을 적용해 행복해지는 법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주로 원고를 뚫어져라 보면서 읽는데 너무 긴장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도 원고 속으로 안 빨려 들어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니까요. 하하하.”
재하는 강연할 때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런 재하를 보고 선영도 같이 웃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강연할 때 안 떨리는 게 이상한 거죠. 중요한 건 작가님처럼 떨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과 기꺼이 맞서는 거죠. 그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용기 아니겠어요. 독자들도 작가님 글에서 그런 용기와 진정성을 느끼기 때문에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는 거고요.”
“저는 두려운 게 많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에 맞서야 제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실수해도 자책보다는 피하지 않고 해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선영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안다는 재하의 말을 듣고 재하가 참 멋있는 사람이구나, 했다. 출판사에서 재하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심리학을 전공했다던 재하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심리학을 아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심리학을 삶에 적용하면서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해 나가고 있었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느새 고속열차는 구례역에 도착했다. 선영은 재하와 이야기하면서 오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작가님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왔어요.”
“저도 팀장님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여기에 얼마나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서울로 가시기 전에 제 작업실에 초대하고 싶어요.”
“아, 좀 쉴 생각으로 온 거라 서울로 빨리 돌아가지는 않을 거예요.”
“잘됐네요. 그러면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열차가 멈추자, 재하는 자기 백팩을 등에 메고 선영의 캐리어를 들고 열차에서 내렸다. 선영은 자신의 캐리어가 무겁지 않아서 자신이 끌 수 있다고 말했지만, 재하는 자기 손이 심심해한다면서 헤헤 웃었다. 선영도 웃는 재하를 보고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