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와 선영은 같은 마을버스를 타고 오다가 재하가 선영보다 한 정거장 앞서서 내렸다.
“연락할게요, 팀장님.”
재하가 내리면서 선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영도 “네, 조심히 가세요, 작가님.” 하면서 손을 흔든다.
정류장에서 재하의 집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재하는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다가 서울로 이사 갔다. 그 이후로 집은 계속 비어있었다. 지난해 초 재하는 고향에 돌아와서 살기로 결심하고 허물어지기 직전인 한옥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말이 수리지 골격만 그대로일 뿐 새로 짓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안에서 밖을 훤히 볼 수 있도록 만든 넓은 창이었다. 수리를 끝내고 들어가 살면서 창에 신경 쓴 보람을 느꼈다. 앉아서 작업하다가 고개만 들면 눈앞에 근사한 풍경이 펼쳐졌다. 재하는 그때마다 구례에 내려와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뒤편에는 경사가 완만한 작은 언덕이 있다. 그곳에 봉긋 솟은 재하의 부모 묘가 있다. 공무원이었던 재하의 아버지는 재하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사망했다. 과로사였다. 갑작스러운 재하 아버지의 사망은 모자에게 큰 충격이었다. 재하 어머니는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해 재하를 데리고 외가가 있는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서도 재하 어머니는 증세가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할 뿐이었다. 급기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의사는 심한 우울증이라고 진단했다. 의사나 외가 식구들은 어머니가 혹시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재하가 생각하기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런 의욕이 없는 재하 어머니는 대소변도 침대에서 해결해야 했다. 낮에는 외할머니가 기저귀를 갈았지만, 밤에는 재하의 몫이었다. 그때도 어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한숨만 내쉬며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재하는 그런 어머니를 8년 동안 지켜봐야 했다. 어머니는 재하가 고2 때 사망했다.
재하는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웃어본 기억이 없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구만리 같았고 집에서 맥 없이 늘어져 있는 어머니를 볼 때면 숨이 막혔다. 기저귀를 갈 때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이러다가 결국 어머니는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그때 차라리 자신도 같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원래 이렇게 살려고 세상에 태어난 건가, 자문하며 비관한 적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밥을 먹어도 아무 맛을 느낄 수가 없을 만큼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길고 지난한 암흑의 시간이었다.
어머니 사망 후에도 재하에게 드리워진 잿빛 구름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재하는 그 잿빛 세상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라도 다르게 살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동안 재하의 내면에서 잔뜩 위축된 자아가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어 행복해지려는 생각과 행동을 자꾸 방해했다. 부모 없이 산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힘들었던 건 행복해지려고 발버둥을 칠 때마다 암흑으로 이끄는 자기 자신이었다. 행복하게 살려면 끊임없이 위축되려는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야 했다. 그래서 재하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심리학을 공부한다고 금세 행복해지는 건 아니었다. 행복은 직접 미지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었다. 재하가 배운 것을 적용하는 것은 매번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건 부정적인 감정은 쉽게 전염된다는 것과 심리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이 비단 자기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하는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선영이 그 글을 구독하게 되었다.
선영의 제안을 받고 책을 냈어도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다면 고향으로 내려와 살 생각은 못 했을 터였다. 다행히 두 권 모두 좋은 결과를 얻었고 가끔 강연도 나가면서 전업 작가로 살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수입이 많은 건 아니지만 글 쓰고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텃밭에 채소도 기르며 사는 지금의 생활에 재하는 매우 만족했다.
집 마당에 들어서자, 진순이가 꼬리를 흔들며 짖어댔다. 구례 터미널 부근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작은집에서 기르는 진돗개가 새끼 세 마리를 낳았고 그 중 한 마리를 재하가 데려와 기르고 있었다. 재하는 이름을 진순이라고 지었다.
“진순아, 아빠 왔다.”
재하가 백팩을 멘 채로 쭈그리고 앉아 진순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이고, 우리 진순이 잘 있었어?”
진순이가 재하의 손길을 좋아하며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더니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하하, 우리 진순이 기분 좋구나. 아빠도 진순이 보니까 좋다.”
재하는 진순이 배를 여러 번 쓰다듬고는 진순이 목줄을 풀었다. 그러자 진순이는 좋아서 마당 여기저기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재하도 진순이 뒤를 따라다니며 하하하 웃었다. 재하가 진순이를 데려올 때는 너무 작아서 진돗개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랬던 진순이가 1년이 지난 지금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진돗개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재하에게 진순이는 처음 봤을 때처럼 여전히 여리고 귀여울 따름이다.
재하는 한참 진순이와 놀아준 다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진순이도 현관까지 들어와 밖을 향해 앉았다. 재하가 안에서 글을 쓸 때면 진순이는 주로 현관에 앉아 있었다. 진순이 집은 현관 밖에 있다. 집수리할 때 남은 목재로 재하가 손수 만든 집이다. 처음에 재하는 지금보다 훨씬 작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걸 재하의 작은아버지 기동이 보고 개는 금세 자라니 이왕이면 크게 만드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그때 작은아버지가 아니었다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진순이 때문에 얼마 안 가 집을 또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재하는 글을 쓰다가도 이따금 “진순아!” 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진순이는 밖을 보고 있다가도 꼬리를 흔들며 멍멍 짖었다. 그런 진순이를 보고 재하는 껄껄 웃었다. 진순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마 재하가 소리 내서 웃는 일은 좀처럼 없지 싶다.
재하는 아침저녁으로 진순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걸 매우 좋아한다. 특히 적막할 수도 있는 밤에 진순이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그러니 재하가 진순이를 보면 자동으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당연했다.
재하는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어제는 서울에 있는 한 서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운영되는 독서 모임 회원을 대상으로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재하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서로 눈을 보며 대화할 수 있는 작은 모임을 선호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서점 관계자를 포함해 스무 명 남짓이었다. 그들은 재하가 어떻게 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재하는 서울에 가기 전에 서점 사장으로부터 참석자들이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는 걸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어두웠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고 책을 내기까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재하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참석자들도 있었다. 재하는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모임이 끝나고 참석자 중 열 명 정도가 재하의 책을 들고 와서 사인을 요청했다.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재하는 사인할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고마움을 전했다.
서점을 나와 숙소로 가면서도 사인받으려고 줄 선 사람들이 생각났다. 이 모든 게 재하가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 선영이 아니었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재하는 지금 쓰고 있는 원고가 완성되면 가장 먼저 선영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구례로 내려오는 고속열차 안에서 선영을 만난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 재하는 다시 생각해도 선영과 나란히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던 시간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어서 재하는 선영을 초대할 때 음식은 무얼 준비하고 음료는 차를 준비할지 아니면 커피를 준비할지 생각이 바빠졌다. 음식은 사촌 준석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작은아버지 기동의 외동아들인 준석은 요리학교를 나와 양식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고 얼마 전까지 서울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지금은 사귀던 여자친구가 임신하는 바람에 집에 내려와 있다. 여자친구의 이름은 슬기였다. 슬기는 준석의 고등학교 친구로 농협 근처에 있는 한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했다. 기동은 이제 스물한 살인 준석이 덜컥 애부터 가졌다며 못마땅해했다. 평소 두 사람은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기동은 준석이가 구례에 남아서 마트 일을 도우며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준석은 요리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떠나 서울로 갔다. 그 후로 준석은 아버지에게 의지하지 않고 본인들이 알아서 살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친 상태였다. 준석은 조만간에 방을 얻어 슬기와 둘이 살림을 차릴 생각이었다.
재하는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준석이 곧 애 아빠가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입이 쩍 벌어졌다. 그래도 피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려는 준석이 기특했다. 만약 자신이 준석의 나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하면 준석이처럼 하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재하는 전적으로 준석을 지지하고 있다. 준석도 자주 재하를 찾아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재하는 준석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