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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3화 작별

 선영은 주호에게 말한 대로 월요일 하루 만에 인수인계를 마쳤다. 직원들에게는 개인 사정으로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했을 뿐이다. 모두 선영이 직접 뽑은 직원들이라 그런지 그들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올 때는 선영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집으로 오는 전철 창문 밖으로 지난 5년간의 기억들이 차례차례 스쳐 갔다. 출간 때문에 밤잠을 줄여가며 일하면서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 힘든 줄 몰랐고 기대 이상의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어서 기뻤다. 비록 주호와 헤어지면서 출판사를 떠나게 되었지만, 5년간의 모든 순간이 소중한 추억이 되리라는 건 분명했다. 


 그날 저녁 선영은 여행 가방을 꾸렸다. 서울에 남아 있어봤자 생각이 많아져 마음만 산란해질 게 뻔했다. 당분간 서울을 떠나 고모가 있는 구례에 있을 생각이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와 책 몇 권, 그리고 노트북이 전부였다. 선영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캐리어 지퍼를 닫았다. 

 내일은 친구 현정을 만나고 모레쯤 떠날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현정에게만큼은 알리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대학 신입생 때부터 지금까지 속마음을 털어놓는 친구였다. 


 밤 열 시 무렵 선영은 와인을 한 잔 마실지 고민했다. 지난번처럼 쓰러질 정도로 많이 마시지는 말고 딱 한 잔만 마시고 자자고 생각했다. 막 와인 코르크 마개를 따려고 할 때 초인종이 울렸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생각하며 현관으로 가서 어안렌즈를 들여다봤다. 고개 숙인 누군가의 정수리가 보일 뿐이었다.

 “누구세요?”

 “선영아, 나야.”

 주호였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는 것 같은데.”

 “얼굴 보고 할 말이 있어. 잠깐만 문 좀 열어 봐.”

 선영은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주호의 마지막 항변은 들어줄 수 있지 않은가, 비록 그 항변이란 게 전혀 공감할 수 없는 헛소리라 할지라도, 하는 생각에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주호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선영을 와락 껴안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선영은 주호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주호는 저항하는 선영에게 강제로 입을 맞췄다. 선영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돌려 주호의 입술을 피했다. 주호에게 술 냄새가 진동했다. 

 “제발 이러지 마요. 지금 안 떨어지면 소리 지를 거예요.”

 선영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주호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선영아. 한 번만 용서해 줘. 난 너랑 헤어져서 살 수가 없어. 다시 한번 생각해 줘.”

 주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있었다.

 “용서요? 허, 참 나. 같은 얘기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내가 뭐에 홀린 게 틀림없어.”

 “홀린 것치고는 너무 자연스럽게 보이던데요.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지아 씨는 오빠 속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밤을 함께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오후 늦게까지 그러고 있는 게 홀린 사람이 할 행동이에요?”
 “그, 그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미안해.”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까 그만 돌아가요.”

 선영은 현관문을 활짝 밀어제치고 주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무릎 꿇은 채 앉아 있던 주호는 마지못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선영을 바라보았다. 선영은 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주호는 선영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투덜투덜 걸었다. 선영은 그런 주호의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먹먹했다. 어쩌다 두 사람이 이렇게 돼버렸는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선영은 생각이 복잡해지자 이내 문을 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닫고 들어와 버렸다. 


 선영은 와인을 마시며 생각해 보니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쌓아온 관계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게 허망했다. 그렇다고 지난 모든 추억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신이 더욱 초라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인생이 자신에게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자신이 잘 견뎌내리라 믿었다. 선영은 와인 잔을 마저 비우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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