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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1화 4월은 잔인한 달

 봄이 오는 속도가 유난히 더디게 느껴졌던 3월이었다. 다행히 4월에 들어서자 “이제 진짜 봄이구나!”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봄은 순식간에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첫 주말을 맞이하여 서울 벚꽃 명소에는 봄을 즐기러 나온 인파로 붐볐다. 선영은 버스 안에서 길가에 만개한 벚꽃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몇 시간 후면 그녀도 남자친구인 주호와 함께 벚꽃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절로 흥겹다. 

 선영은 지난밤 주호의 문자를 받았다.      


 -내일 저녁에 우리 벚꽃 구경 가자.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던 터라 선영은 그 한 문장에 짐짓 설렜다. 대학 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은 회사에서도 매일 본다. 그래서 주말만큼은 각자 편하게 지내자는 주의다. 금요일에도 주호는 출판인 모임 참석차 일찍 퇴근하면서도 선영에게 주말에 만나자는 말은 없었다. 그랬던 그가 불현듯 늦은 밤 문자를 보낸 것이다. 선영은 둘만의 데이트가 언제였던가 생각해 보니 아득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밥도 같이 먹지만 그것을 데이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끔 주말에도 만나 밥을 먹고 주호의 오피스텔에서 잘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일에 관해 이야기할 뿐 둘만의 깊이 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에게 관심이 없어졌나?’ 하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오래된 연인이라 이미 가족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그만큼 편해서 그런 거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넘기기 일쑤였다.      

 선영은 5년 전 대학 선배이자 남자친구인 주호의 제안으로 지금 다니는 출판사를 시작했다. 주호가 자본금과 영업을, 선영이 실무를 맡았다. 그전에 선영은 한 중견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출판사를 시작할 때는 주호와 선영, 이렇게 단둘이었지만 지금은 직원이 열 명으로 늘었다. 사무실에서 주호와 선영의 관계는 사장과 편집팀장의 관계다. 출판사가 있는 5층 건물은 주호 아버지 소유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선영뿐이다. 가끔 주호와 선영은 주호 부모와 밥을 먹는데, 그때마다 주호 부모는 출판사 성장에 선영의 공이 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호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주호와 선영이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주호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선영은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자기 얼굴을 확인했다. 오늘 화장에 신경 쓴 게 티가 나 빙긋 웃었다. 화장뿐 아니라 옷도 나름 신경 써서 차려입었다. 주호는 선영이 하늘거리는 스타일의 치마를 입는 걸 좋아했다. 선영은 그걸 알면서도 일할 때는 치마보다는 바지를 즐겨 입었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거나 외부에서 사람을 만날 때는 바지가 편했기 때문이다. 

 선영은 초인종을 누르려다 번거롭게 문을 열어 주러 나오게 할 필요가 있겠나 싶어 곧바로 전자식 현관문 잠금장치에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는 1013. 주호의 생일이었다. 

 “삐리리!”

 짧고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선영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주호의 이름을 막 부르려고 할 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주호가 샤워 중이려니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선영은 주호가 샤워 중 아니었나, 생각하며 소파에 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기에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놀란 눈을 하고 서 있었다. 그녀는 주호의 흰 반소매 티셔츠와 트렁크 팬티 차림이었다. 모두 선영이 사준 옷이었다. 

 “지아…… 씨?”

 “어, 팀장님!”

 그녀는 다름 아닌 출판사 직원 신지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선영은 순간적으로 골머리가 띵했다.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무 놀라 한 번 벌어진 선영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지아는 놀란 눈을 하면서도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다거나 허둥대지도 않았다. 

 “지아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 그 차림은 또 뭐고요?”

 선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아는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 목욕가운 차림인 주호가 선영의 시선과 마주쳤다.

 “어, 선, 선, 선영아. 연락도 없이 여기 웬일이야?”

 주호가 더듬거리는 걸로 봐서 적지 않게 당황한 것 같았다. 

 “뭐?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고? 오빠가 벚꽃 구경 가자고 문자 했잖아요.”

 선영은 주호의 말을 듣고 말문이 턱 막혔다. 

 “뭐야? 그러면 오빠가 문자 한 거 아니었어요?”

 선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아에게 눈을 돌렸다. 일할 때 쓰던 그녀의 빠른 판단력이 지금, 이 순간 휙휙 작동했다. 그렇다면 지아가 의도적으로 선영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주호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냈다는 말이었다. 기가 찼다. 주호도 지아를 흘긋 보며 눈을 부라렸다. 선영은 속이 뒤틀려 이 공간에 조금도 있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남녀의 모습에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막 나가려는 선영을 주호가 막아섰다. 하지만 선영은 주호를 있는 힘껏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선영아, 잠깐만.”

 닫힌 문 저편에서 주호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영은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자 버튼을 빠르게 서너 번 연달아 눌렀다. 1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18층까지 올라오는 몇 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을 누르고 문이 닫히려 할 때 옷을 챙겨 입은 주호가 슬리퍼를 끌고 선영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선영은 다급하게 닫힘 버튼을 꾹꾹 눌렀다. 다행히 주호가 손을 뻗는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은 그대로 닫혔다. 그때 선영은 다리가 휘청거려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조금 있으면 주호와 선영이 사귄 지 10년이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을 함께한 두 사람은 일에 관해서 제법 의견이 잘 맞았다. 주호가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선영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중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은 전부 선영이 기획한 결과물이었다. 사실 처음에 주호는 선영의 기획서를 의심쩍어했다. 하지만 매번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는 걸 보고 주호는 더 이상 선영의 기획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일은 그렇다지만 연인 관계가 금이 간 이 마당에 선영이 주호와 계속 얼굴을 맞대고 일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선영의 머리 위로 하얀 벚꽃이 무심히 날렸다. 믿었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바람피운 장면을 목격하고 눈부시게 핀 벚꽃을 본다는 건 너무도 잔인한 일이었다. 차라리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 벚꽃이 아니라 장대비였다면 더 좋았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식간에 장대비가 가시처럼 온몸에 우두둑 박혀 혈을 막는 듯했다. 맥이 풀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선영은 남자친구의 배신 때문에 울고 싶지 않아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은 미세먼지 하나 없이 화창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 어디에도 그녀의 편은 없지 싶었다. 눈물이 났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걷고 또 걸었다. 걷고 나면 복잡한 머릿속이 비워질 것 같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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