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 Oct 01. 2024

제2화 퇴사할 결심

 해가 중천에 떴지만, 선영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다. 지난밤 늦게 귀가한 그녀는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셔도 주호 오피스텔에서 봤던 장면이 잊히지 않아 결국 한 병을 다 비우고서야 침대에 쓸어졌다. 선영은 평소에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았다. 어쩌다 회식 자리에서 맥주를 마시긴 해도 몇 모금만 홀짝거릴 뿐이었다. 그런 선영의 집에 와인이 있는 것은 순전히 주호 때문이었다. 주호는 와인 마니아였다. 가끔 주호가 선영의 집에 올 때가 있는데 그때 주호를 위해 선영이 구입한 것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여전히 선영은 미동도 없이 누워있을 뿐이다. 곧이어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마침내 선영이 부스스 눈을 떴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머리가 지끈거려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겨우 일어난 선영은 고무밴드로 머리를 질근 묶고 현관문 앞에 섰다.

 “누구세요? 음, 음.”

 선영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청소 대행업체에서 나왔습니다.”

 짜증 섞인 남자 목소리였다.

 “네? 잘못 오신 거 같은데요.”

 “여기가 김순임 씨 댁 아닌가요?”

 “아니에요.”

 선영의 말에 남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죄송합니다. B동이 아니라 A동 501호라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네, 네.”

 선영은 더 이상 대꾸할 힘이 없어 그대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선영은 침대 옆 협탁에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어제 선영이 주호의 오피스텔에서 나와 무작정 걷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울렸다. 주호였다. 선영은 받지 않았다. 그러자 주호는 문자를 보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선영은 주호 얼굴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주호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결국 휴대전화 전원을 꺼버렸다.

 휴대전화 전원을 켜자, 스무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쌓여있었다. 발신자는 모두 주호였다. 그뿐 아니라 문자와 음성 메시지도 있었다. 선영은 확인하지 않고 모두 삭제해 버렸다. 오늘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이라 다행이었다.

 선영은 지금까지 출판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출판사가 안정된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선영은 그 성과가 매우 뿌듯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계속해서 주호의 얼굴을 보며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주호가 출판사 사장이므로 자신이 그만둬야 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선영의 다음 행동은 명확했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더 끌 것도 없었다. 선영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 주호를 만나 직접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주호를 만나서도 눈물을 보이거나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 네가 나한테 그럴 줄은 몰랐다 같은 말은 하지 않을 셈이었다.

 예전에 어느 드라마에서 엄연히 결혼할 애인이 있는 남자가 애인의 친구와 바람피우는 장면을 보고 남자가 친구와 바람난 것도 모르는 여자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막장 드라마이긴 해도 얼마나 둔하면 자기 남자친구가 바람피우는 줄도 모를 수 있냐고 정말 한심한 여자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랬던 자신이 지금은 그 둔하고 한심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때 했던 생각을 되돌리고 싶었다. 막장 드라마라고 작가를 비하했던 것도 후회했다.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호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론을 내리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했다. 다만 선영은 고모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어 죄송스러웠다. 고모도 주호의 부모처럼 출판사가 안정되었으니 이제 주호와 선영이 결혼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영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더 바랄 게 없다고 고모는 자주 말했다. 그런 고모에게 주호와 헤어지고 출판사도 그만두었다는 말을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고모, 미안해요.’     


 그날 저녁 선영은 주호를 만나러 나갔다. 선영이 주호에게 전화했을 때 주호는 반색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주호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저녁 먹자고 했다. 하지만 선영은 그럴 것 없이 밖에서 만나면 된다고 했다. 주호도 마지못해 좋다고 했다.

 선영은 어제보다 화장을 더 신경 썼다. 어제 울기도 했고 와인도 많이 마셔서 얼굴에 부은 티가 났다. 그래도 바람피운 남자 때문에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짓는 비련의 여주인공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비참하기 그지없지만 적어도 주호 앞에서는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은 자존심인지도 몰랐다.

 선영이 약속 장소에 들어갔을 때 먼저 도착한 주호가 일어나서 손짓했다.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선영도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을 터였다. 선영은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주호 맞은편에 앉았다.

 “어서 와. 차는 안 막혔어?”

 주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일요일이라 막히지는 않았어요.”

 선영은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아메리카노 마실 거지?”

 주호가 일어섰다.

 “네, 고마워요.”

 선영은 주문하러 가는 주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주호가 커피 두 잔과 물 두 잔을 쟁반에 들고 돌아왔다.

 선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주호는 커피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어제 일은 내가 사과할게. 너에게 일부러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니었어.”

 주호가 물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오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게 중요하지. 그것도 오빠 집에서.”

 “믿기 어렵겠지만, 이번이 처음이었어. 난 지아 씨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그날 우연히 지아 씨를 만나서 술 한잔하다가 일이 이상하게 된 거였어.”
 “오빠가 지아 씨를 어떻게 생각하건 내겐 중요하지 않아요. 오빠는 결혼할 사람이 있는데도 다른 여자와 밤을 보냈어요. 그게 팩트라고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맹세할게. 정말이야. 지아 씨도 출판사에서 내보낼게.”

 “지아 씨와 오빠 관계는 오빠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지금 말하려는 건 우리는 끝났다는 거예요. 오빠도 알다시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정도로 내가 마음이 넓지가 못 해요.”

 “선영아, 우리 시간을 갖고 생각하자. 우리가 만난 지가 10년인데 한번 실수했다고 단칼에 끝낸다는 게 말이 되니?”

 “그럼, 만약에 내가 오빠처럼 다른 남자랑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오빠는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에요?”

 “그게 아니라…….”

 “더 이상 이런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아니, 이참에 우리 결혼하자.”

 “결혼? 이 상황에서 결혼하자는 말이 나와요? 결혼하자고 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오빠는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군요.”

 선영은 너무 서럽고 화가 치밀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물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중으로 진행 중인 일은 인수인계 마칠게요.”

 “선영아, 그렇다고 출판사를 그만둘 것까지는 없잖아. 출판사는 우리 둘이 키운 거잖아.”
 “나도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오빠와 같은 공간에서 일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떠나는 수밖에요.”

 “선영아, 며칠 쉬면서 생각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오늘 다 끝낼 필요는 없잖아.”

 “아니요. 며칠 쉰다고 해도 내가 오빠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요.”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커피전문점을 나와버렸다. 주호가 선영을 부르며 뒤따라 나왔지만, 선영은 바로 앞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이전 01화 제1화 4월은 잔인한 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