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나답게 사는 것을 꿈꿔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우선하던 타인의 시선을 그만 거두고 이제는 내 가슴이 반응하는 방식으로 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또한 어떤 방식으로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발로 실현할 수 없는 꿈이 되고 말 것이다.
막상 자신이 바라던 대로 자신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순간순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마치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밧줄에 발을 디디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일 수 있다. 그것은 생각이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여기서 잘 정립된 생각은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실천은 이론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이론이란 것이 단순히 고리타분하고 실질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이론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사람의 판단 오류라고 믿는다.
때로는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한두 마디 외에는 통 생각이 나지 않아 버벅거릴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실제로는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무엇을 잘 안다는 말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일 수 있다. 뭔가를 잘 안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설명할 수 없다면 잘 아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만 아는 것은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싶다는 바람에서 기인한 착각이거나 단지 일부분을 알고서도 전체를 안다고 스스로를 최면(催眠) 상태에 밀어 넣은 결과일 수 있다.
우리는 설명이 곤란하거나 설명할 수 없을 때 ‘내 마음 알지?’라는 한 문장으로 슬쩍 넘어가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연인이나 부부 중 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은 단지 ‘예’나 ‘아니오’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희미해진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임을 되새기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을 왜 사랑했고 얼마만큼 사랑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듣고 자신이 감동하기를 기대하며 그 감동으로 둘의 관계를 단순히 동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임을 재인식하는 중대한 의식일 수 있다. 그냥 단순히 ‘하늘만큼 사랑해’나 밤하늘에 별 하나를 가리키며 ‘저 별을 뺀 온 우주만큼 당신을 사랑해’와 같은 대답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무튼 자신의 사랑을 보이지도 않는 마음에만 떠넘기지 말고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답게 살기를 꿈꿔왔다면 먼저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나답게 살고 싶다는 것은 힘든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데서 기인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회피성 생각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설명을 해보면 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고 이를 한 단계 더 나아가 ‘나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존재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생각하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시간 속에 생각의 조각들이 모여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틀을 짓게 된다. 또한 하이데거는 ‘인간은 언어라는 존재의 집에 거주한다’라고 했다. 인간이 언어 속에 존재한다면 사람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존재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세상에 드러나는 표면적인 나를 규정해 보고 그런 다음에 내면의 나를 규정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나 자신을 언어로 규정하는 일은 사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어린 왕자는 말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막에 실제로 우물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물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그 믿음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기를 바라는 것은 그렇게 하면 한 번뿐인 이 삶을 더 잘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