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스레할 즈음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증상이 시작되었다. 눈의 초점은 약간 빗나간 듯 흐릿하고 속은 답답하고 머지않아 두통이 몰려올 거라는 예감, 바로 내가 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증상이다.
대학교에 다닐 때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읽게 되는 책들은 주로 자기 계발에 관한 도서들이었다. 그런 책들에는 직장생활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이러해야 한다는 리스트를 제시하면서 성공하고 싶다면 그것에 따르도록 유도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그때는 사회초년생으로서 직장에 잘 적응하는 것을 뛰어넘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시기였다. 성공에 목마른 사회초년생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제시된 리스트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 당시 갑작스럽게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가족들이 풀뿌리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성공하고 싶었다. 주말을 제외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다음날 새벽 한두 시까지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위해 온몸을 불태웠다. 물론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사람도,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다. 온전히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이란 없었다.
내게 어떤 업무가 주어지면 다른 사람과 차별성이 드러나도록 처리하려고 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꾸준히 공부했고, 노트북에 저장된 자료는 늘 새로운 것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시간이 흘러 인정받으면 인정받을수록, 직장생활이 안정되면 안정될수록 주말에 쉬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주말에도 노트북을 들고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 적용해보고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나는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신입 및 기존 사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순간도 느슨하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긴장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스스로 나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내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나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영원한 젊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일이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일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도리언 그레이처럼.
그런 나에게 경고를 보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소화불량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늘 긴장된 상태로 살았기 때문에 아무리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고 빨리 먹는 버릇까지 생겨서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주 병원에서 검진받아야 했고 서랍에는 늘 병원에서 받아온 약봉지와 한약방에서 지어온 약들이 쌓여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한번 체하면 심한 두통을 동반하는 바람에 꼼짝도 못 하고 드러누워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몸이 체증과 심한 두통으로라도 나 자신을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나 자신이 너무 민감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짐작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성격과 생활 습관을 바꾸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파괴하는 잘못된 생각의 틀을 부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것을 내려놓으면서 다행히 심한 두통을 동반한 소화불량은 사라졌다. 물론 소식(小食)과 단식을 생활화하고 있는 가운데도 가끔 소화불량이 있을 때가 있지만 예전처럼 신경 쓰지 않고도 쉽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이다.
체증을 가라앉히고 약간의 두통을 이겨내는 데는 산책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산책 가는 길에 약국에도 들렀다. 인근에 있는 여러 약국 중에서 이런 증상이 있을 때 찾아가는 약국이 있다. 약사는 한방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주었고 그 약이 나에게 효과가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약국에 갈 때마다 다른 약사들은 미처 모르고 있고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항에 대해 자랑하듯이 하는 말을 약사로부터 들어야 한다. 약사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근에 다른 약국들은 병원이 있는 건물에 있지만, 그 약국은 병원과는 떨어진 곳에 있다. 그래서 그 약국은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약품이나 물품을 사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이번에 나는 약사로부터 소화불량과 체증의 다름에 대해 들었다. 약사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 그런가요?”라는 반응을 보이고 약을 건네받았다. 약을 먹고 약국을 나온 나는 조금 오래 걸을 생각으로 해변 산책로로 향했다.
산책로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반려견을 앞세우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요즘에는 개들이 형광색 목줄을 하고 있다. 어떤 주인과 개 커플은 잔디밭을 뛰어다니기도 하는데 그 장면을 멀리서 보면 어두워서 개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는 형광색 목줄만 보이기 때문에 그 모습이 마치 공중에 떠다니는 유령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어떤 개는 자신이 뛰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주인에게 인식시키고 말겠다는 듯이 주인을 끌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한다. 그러면 주인은 자신의 개가 밖에 나와 뛰어다니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이전보다 자주 개를 산책시켜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의 그런 행동은 대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바닷가를 한참 걷다가 멈춰 서서 펜스 너머로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가로등에 비친 물결과 귀에 들리는 파도 소리의 부조화로 순간 배를 타고 있는 듯이 멀미를 느끼고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조금 더 걷다가 집 쪽을 바라보는데 마치 성벽처럼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사 중인 아파트들이 하늘로 조금 더 올라가면 집 베란다에서 여태껏 바라보았던 해안선은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에 나와 바다를 내다볼 때마다 나에게 부여된 특권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공사가 시작되고 아파트의 층수가 점점 높아질수록 곧 사라지고 말 그 경치가 나에게 주어진 특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솟아오르는 고층 건물들로 인해 해안선을 오롯이 볼 수 있는 곳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해안에 있는 공터가 공공지가 아닌 사유지라면 쉽게 제약되지 못할 것이다. 경치를 볼 수 있을 때 좀 더 자주 보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다를 보면 태양이 바다 위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구름을 뚫고 올라오는 장면은 신비스럽기까지 하고, 오후에 바다를 보면 아침에 봤던 구름은 간데없고 짙은 청록색 바다 위에 배가 지나가고 남긴 하얗고 기다란 두 갈래 포말만이 생겨났다 없어졌다를 반복할 뿐이다. 문득 서운한 생각이 들어 밤에 바다를 또 한 번 더 바라보면 여기저기 점멸하는 공사장 불빛들이 시선을 방해할지라도 바다에 드리워진 달빛은 사람의 마음에 평온을 안길 정도로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요즘엔 하루에 세 번씩 내가 바다 앞에 서고 바다가 내 앞에 서서 서로 마주하고 마음을 열고 있지만 바다가 서서히 가려져 못 보게 되더라도 서운함이 덜 할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한 시간쯤 걷다 보니 속이 답답하다거나 체한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약을 먹고 충분히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