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상처는 시간이 가면 낫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사회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갈 뿐이다.
새해 첫날 부산 영도에 있는 한진중공업 앞을 지나가는데 낯선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천막은 영하의 날씨에 차가운 바람과 냉기를 막기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그들이 회사 앞에 천막을 치고 생활을 하는 것은 캠핑 감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천막으로 내몰았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따뜻한 집을 두고도 추위를 견디며 천막생활을 하는 것일까? 또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족은 어떤 심정일까? 이 추운 겨울에 웬 천막이 차려져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 천막은 가진 것이 몸뿐인 약자들이 몸을 절벽에 세우는 심정으로 농성하는 장(場)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막 앞에는 굵은 글씨로 ‘김진숙 복직 촉구 릴레이 단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1996년 2월 노조 대의원으로 당선된 후 노조 집행부의 이용성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제작, 배포했다는 이유로 3차례에 걸쳐 부산 경찰국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했고, 사측은 이를 이유로 김 지도위원을 해고했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9년 10월 2일에 해고 등이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회사에 복직을 권고했고, 2020년 9월 복직을 재권고했다. 사측은 법정관리를 이유로 복직을 시키지 않았고, 최근 법정관리를 벗어나 동부건설 컨소시엄에 인수되었다. 그래서 한진중공업을 인수한 동부건설 컨소시엄에게 해고노동자 김진숙 씨의 복직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와 개인들의 릴레이 단식 농성이 진행 중이었고, 2022년 1월 1일은 단식 릴레이 60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2020년에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사측에 김진숙 씨의 복직을 권고했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접했을 때 이제 드디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고 늦게나마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권고라는 것이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저 시간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측이 복직 권고안을 받아들이기를 촉구하는 일뿐이다. 이 일은 김진숙 씨 단 한 명만의 복직이 아니라 부당하게 해고된 힘없는 노동자들의 복직과 명예회복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사측에 복직을 촉구하기 위해 누군가는 싸늘한 콘크리트 바닥에 천막을 쳐야 했던 것이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한구석에서 또 다른 나를 위해 천막 농성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곳에서 해결되지 못한 갖가지 사회문제가 있다는 것을 또 다른 나인 이웃들과 함께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가 있는 곳에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 문제인지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제를 인식하면 시간을 들여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거들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연대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상처 난 곳에는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거나 붕대를 감는다. 사회 곳곳에 난 상처도 마찬가지다. 상처는 관심이 있으면 멀리 있어도 눈에 보이고 관심이 없으면 바로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곳에 밴드나 붕대가 아주 헐겁게 붙여져 있다.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연대가 커질수록 상처에 붙인 붕대는 단단해질 것이고 치유도 빨라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벅차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특별히 여유 있게 사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이 사는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주위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에 공감하고 문제 해결을 바라며 그곳에 자신의 시간을 들인다.
새해를 맞으며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천막이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게 했다. 지금 반성한다고 해서 내 주위의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며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적어도 내 주변에서 발생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인식만은 확고해질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엄마, 아빠, 아들, 딸, 이웃이 차가운 길바닥에서 우리 사회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그들의 목숨과도 같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 공감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2022년 2월 25일 김진숙 씨는 정년을 하루 남겨놓고 명예 복직되었다. 이날 김진숙 씨의 명예 복직 행사뿐만 아니라 명예퇴직 행사도 함께 열렸다. 이로써 37년 동안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과 고공 크레인에서 해직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한 김진숙 씨의 투쟁은 이 땅의 또 다른 해직 노동자 김진숙에 대한 숙제를 사회에 안겨주고 막을 내렸다. 영도조선소 정문 앞 천막 농성장도 설치한 지 600여 일 만에 노사가 자진 철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