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안에 무수한 부조리가 파편처럼 떠다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에게서 비롯된 생각들이 몽글거리며 존재를 드러내려 할 때마다 여지없이 부유하는 부조리의 파편에 부딪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의 알몸이 부끄러워서 덤불로 황급히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처럼.
벽에 걸린 액자를 다른 방으로 옮기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파트 창호를 새로 교체하는 작업 도중에 경력이란 것을 막 시작하려던 시원치 않은 초보 작업자가 창틀에 쏘아야 할 폴리우레탄 폼을 엉뚱하게도 새 벽지를 발라 놓은 벽에 쏘아대는 바람에 벽지에 듬성듬성 황토를 짓이겨 발라놓은 듯한 흔적이 생겨버렸다. 그걸 목격한 작업 책임자는 그 자리에서 작업자를 나무라기 시작했고 너무도 당황해하는 작업자는 헐레벌떡 움직이며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보 작업자는 열심히 굳어버린 폴리우레탄 폼을 벽지에서 떼어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순간에 분출된 용암의 습격을 받은 것과 같은 흔적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기엔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창문을 기준으로 좌측 벽에는 액자를 걸 생각이었고 우측 벽에는 책장을 놓을 생각이었다. 액자를 걸고 책장을 놓으면 폴리우레탄을 떼어낸 황톳빛 자국은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작업자들에게 벽지를 새로 바르는 데 들어갈 비용을 요구하지 않고 그 일을 마무리 지었다. 예정대로 그 자리에 액자가 걸리고 책장이 들어섰고, 그럼으로써 폴리우레탄의 폭격을 맞은 벽은 액자와 책장에 가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액자를 다른 방으로 옮기려고 벽에서 떼어냈을 때 가려져 있었던 흉한 흔적이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마트에서 벽지를 사다가 크기에 맞게 자른 다음 벽지를 붙였다. 요즘에는 벽지가 스티커처럼 뒷면에 있는 셀로판지만 떼어내고 마른걸레로 눌러가며 천천히 벽에 붙이면 되기 때문에 혼자서도 손쉽게 붙일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 걸 그때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가려져 있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비로소 드러난 흔적은 어쩌면 그때 당시 내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좋은 게 좋다는 말과 타인을 배려한다는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했을 뿐 실체는 내 안이 부조리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인정하려 한다.
그 당시에 나는 각기 개성이 강한 팀원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있었다. 사람들의 개성이 강한 만큼 일의 성과가 좋았던 반면에, 팀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팀원이 관련된 갈등이나 다툼도 많았다. 솔직히 나는 갈등이나 다툼이 일어나는 상황을 몹시 힘들어했다. 그래서 조직 안에서든 밖에서든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나 마찰이 생기면 나는 그 상황을 몹시 불편해하며 어떻게든 나서서 해결하려고 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단단히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건강한 관계에서는 갈등이나 다툼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갈등을 무조건 좋지 않은 것으로 보고 해결하려 했다. 다른 생각과 삶의 배경을 가진 존재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면 갈등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갈등이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불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문제는 갈등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 상황을 성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에 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그 상황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건강한 관계는 그러한 갈등 상황을 잘 다루고 넘김으로써 더욱 돈독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나는 상황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려고 나섰지만 실제로는 해결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봉합하기만 했던 것이다. 내가 해야 했던 것은 그 상황에서 관련 당사자가 각각 주장하는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고 상대를 인정함으로써 객관적 관점을 갖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이었다. 대개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고 타인의 생각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데서 갈등이 시작된다. 당사자들은 미처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잠시 시간을 갖고 자신의 태도가 올바른지 생각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한다. 상대의 의견을 잘 들어보면 어디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지점을 조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설사 해결단계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의견이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사이에서 가끔 있을 수 있는 말다툼 또한 긍정적일 수 있다. 그것은 말다툼을 통해 상대가 마음에 품고 있던 것들을 내뱉음으로써 서로의 생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이를 통해 감정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감정을 정화할 수 있는 지점까지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어느 한쪽이 막무가내로 자신이 잘못했다거나 중도에 직면을 피해버린다면 감정은 정화되지 못하고 그대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는데 이는 언젠가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을 마음에 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건강한 관계는 갈등을 피하거나 일시적인 눈가림으로 완성될 수 없다. 당장 불편하다고 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때로는 배려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일시적으로 살짝 가려놓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해결되지 못한 채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면 인내심을 갖고 마음을 열어 문제를 직면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