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해가 바뀌면 사람들은 새해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대개 건강이나 자기 계발과 관련한 생활 습관 개선이 주를 이룬다. 건강을 위한 결심에는 규칙적인 운동이나 금연, 절주 혹은 다이어트 등이 있고, 자기 계발에 있어서 외적 성장을 위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배움의 실천이나 내적 성장을 위한 독서나 명상, 글쓰기 등을 계획한다. 이러한 결심을 한두 번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나 체화(體化)하기까지는 작은 전쟁에 비유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또 뭔가를 하기 위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마음먹어야 비로소 첫발을 내딛는 일이 있는 반면에,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았거나 밤새 자는 동안 정신이 각성이라도 한 듯이 불현듯 잠자리에서 일어나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뭔가를 곧장 시작하게 되는 일도 있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이 바로 후자와 같은 일이었다.
거의 다 떨어져 나가 버린 2020년의 끝자락이 간신히 손끝에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을 즈음에 나는 에이모 토울스(Amor Towles)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Moscow in Gentleman)』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가택연금을 당한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가 칠백 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로 세상에 나와 수많은 독자에게 읽히는 것을 보고 사람이 한 번 태어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내 삶은 이러이러했노라고 소설로 쓰고 싶다는 욕구가 내 안 깊은 곳에서부터 생겨나 점점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 소설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드러내기 위해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과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이전보다 의미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 삶을 소설로 옮겨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들끓었고 마침내 2021년이 시작되는 아침에 노트북을 열어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겉으로 봤을 때 어느 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난데없는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나 자신의 치유를 염두에 두고 한 일이었고 다만 형식이 시였고 산문이었던 것을 소설로 확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몇 편의 자전적 소설을 썼다.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몇 개월 동안 몰두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대로 사장해 버리기는 나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며 공들인 시간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을이 들어설 무렵 신춘문예에 보내기 위해 소설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중편과 장편의 중간 길이의 소설을 다듬기 시작했다. 몇 번의 퇴고를 거쳤지만 더 이상 줄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중편 소설 부문을 모집하는 한 신문사에만 보내기로 했다. 물론 입상은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내 삶을 돌아본 소중한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뿌듯한 작업이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소설들도 다시 꺼내서 단편으로 다듬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째 소설은 <우리 생의 몫>이란 제목을 붙였다. 이 소설 역시 여러 번의 퇴고를 거쳤지만, 단편소설 분량에 맞추려면 내용을 한참 줄여야 했다. 여러 번 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답이 나오지 않자 소설을 PDF 파일로 만들어 누나와 조카에게 보냈다. 읽어 보고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먼저 소설을 읽은 누나에게서 내용을 줄이게 된다면 어느 부분에서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내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고 그러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자체가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즈음에 조카는 혼자서 배낭을 메고 지리산으로 새해맞이 여행을 떠났다. 조카가 보내온 지리산의 환상적인 일몰과 일출 사진을 보며 카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내가 보낸 소설을 읽고 서평을 써 놓았는데 집에 돌아가면 보내겠다고 했다. 조카에게 소설을 읽어 보라고 보내면서 서평까지 기대하며 보낸 것은 아니었던 터라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아르바이트하느라 바쁘게 생활하는 조카가 시간을 내서 서평까지 썼을 생각을 하니 너무도 고맙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조카가 중학교 때부터 방송부에 들어가면서 신문과 방송에 관심이 생겼고 그 이후로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글쓰기를 즐기는 줄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조카가 서평을 보내왔다. 서평을 읽기 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조카가 내 소설을 읽고 작성한 서평이라는 점에서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평’이라는 제목의 파일을 열고 조카의 글을 읽으면서 내용을 잘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분별로 자신의 소감을 곁들어 놓았다 점에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조카가 마음이 따뜻하고 생각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혹시나 밖으로 표현하지 못한 만큼이나 마음에 옹이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염려와는 달리 잘 자라서 대학생이 된 조카는 열심히 공부한 보상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학교 상담 센터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알차게 생활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실하게 생활하는 조카를 보면 고마울 따름이다.
조카의 글을 읽고 난 후에 나는 조카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일단 SNS나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는 계정을 만들어 시작해보라고 말해주었다. 평소에 독서를 한 후에 서평을 쓰는 습관이 있는 조카에게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에서였다. 글쓰기가 나중에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알려 주었다. 조카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시집을 출간하면서 내가 쓴 시에 대한 평은 여기저기서 듣거나 글로 읽을 수 있었으나 내가 쓴 소설에 대한 첫 서평을 읽는 것은 나에게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앞으로 조카의 글쓰기를 기대하며 그 서평을 올린다.
우리 생의 몫
‘몫’이 가지는 정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럿 사이에서 나누어 각자가 맡은 역할이나 책임을 의미하거나 또 다른 하나는 나눗셈 과정에서 나오는 값 중 하나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결국 어떻게 보면 두 정의 다 나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전자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생의 몫을 이루는 과정에서 오는 슬픔 또한 이래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되는 건가 싶다. 석기가 아끼는 이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났을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던 석기에게 민우가 해주는 말이 당사자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조언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민우는 이미 석기와 같은 슬픔을 겪어 봐서 남아있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글귀와 다른 인물도 아닌 민우만이 말할 수 있는 대사를 통해 석기에게 깨달음을 안겨주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석기라는 인물이 평범해 보이지만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가 감정을 이입하기 쉬운 인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석기가 캐나다로 떠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책을 덮는 순간 독자 또한 오롯이 자신을 위한 삶을 찾기 위해 떠난 석기가 되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승철 선생님은 석기가 꿈을 향해 나아가도록 발판이 되어줄 정도로 존경받을만한 스승이다. 비록 성인이 된 석기와 이승철 선생님이 만나는 장면은 없지만 훗날 캐나다에서 돌아온 석기가 이승철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뵙고 내면이 더욱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가 되는데 어떤 독자는 과연 캐나다가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가 슬픔을 극복하고 민우가 말한 대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좋은 글을 써 나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환경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매우 크다. 나는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여행을 떠난다. 나무도 옷을 갈아입듯 나 또한 지쳤던 마음에 새로운 옷을 입혀 다음 계절을 살아갈 나에게 격려하고 응원하기 위함이다. 늘 봤던 풍경을 벗어나 생소한 풍경 속에 서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일상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여행하려는 목적이 일상에 지쳐 기피하고자 함이 더 클지도 모른다. 기피한다는 것이 안 좋은 표현으로 많이 쓰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 더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석기 또한 이 힘든 현실을 벗어나 행복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죽음이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당연한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 죽기 마련이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죽음을 통해 느껴지는 슬픔은 꽤나 아프고 오래간다. 두려움과 슬픔을 안겨주는 누군가의 죽음을 제삼자 시점에서 바라보니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내가 이미 겪었고 훗날 또 겪을 아픔이기에 이 소설은 마치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대처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