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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지만 풍요로운

by 이광

속이 불편하시다는 어머니를 위해 양배추와 감자와 요거트를 믹서에 넣고 갈아 드렸다. 그렇게 만든 주스가 소화 기능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맛이 좋다고 하셨지만, 사실 입에 맞지는 않는 눈치였다. 양배추와 감자를 살짝 익혀서 갈아도 된다고 들었지만, 일주일을 드셔 본 어머니께서는 양배추를 쪄서 양념장에 싸 먹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어머니께서 쪄 놓으신 양배추에 밥을 올리고 어머니께서 맛있게 만들어 놓으신 양념장을 조금 올려 양배추쌈을 먹었다. 쪄낸 양배추는 꿀에 하룻밤 재어 놓은 것처럼 달았고, 달콤하면서도 짭조름한 양념장과 어울려 밥맛을 돋우는데 그 맛이 참 조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듯 저녁 식탁은 가지 수에서는 소박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 풍요로움이 넘치는 밥상이었다. 거기에 시금치로 슴슴하게 끓인 된장국은 양배추쌈과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구수한 된장과 겨울철에 유달리 단맛을 머금고 있는 시금치가 국물 속에 한데 어우러져 우려낸 맛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실례가 될 만큼이나 맛이 훌륭했다. 어머니와 나는 소식(小食)을 하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숟가락을 순순히 내려놓기가 아쉽고 망설여지는 밥상이었다.


일전에 누나가 소화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고 겨울철 감기 예방에도 좋다며 생강청을 만들어 보냈다. 그 덕분에 하루에 한 차례씩 뜨거운 물에 생강청 한 숟가락을 솔솔 풀어 생강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생강차가 이렇게 맛있는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다고 하시면서 ‘참, 맛있다’는 말씀을 연달아 내뱉곤 하신다. 나 역시 생강차를 마시면 심장부터 시작해 차츰 온몸이 따뜻해지면서 기분이 안정되고 포근함을 느낄 수 있어 차가운 겨울철에 마시기에 딱 들어맞는 음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강청이 바닥을 드러낸 날 어머니께서 그동안 맛있게 잘 마셨다고 하시며 이번에 생강청을 직접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언젠가 블로그에서 생강청 만들기에 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나서 곧장 찾아봤다. 만드는 방법을 읽어보니 쉽게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누나에게 만들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들은 뒤 마트에 들렸더니 때마침 통통하게 살이 차오르고 잘생긴 생강 한 무더기가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듯 진열대에 보기 좋게 놓여있었다. 마트에 질 좋은 생강이 없으면 이번에 못 만들고 훗날을 기대하며 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때마침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질 좋은 생강이 내 눈에 딱 들어왔으니 이를 받아들여 생강청을 만드는 것이 순조로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생강을 깨끗하게 씻은 뒤에 적당히 조각을 내고 물을 조금 넣어 믹서기에 갈았다. 그런 다음에 간 것을 면포에 올려놓고 힘껏 짰더니 예전에 보았던 노란 치자물 같은 생강즙이 졸졸 흘러내렸다. 받아 낸 생강즙을 잠시 두었더니 전분이 바닥에 가라앉았다. 전분을 뺀 생강즙을 냄비에 붓고 메모해 둔 양만큼의 설탕을 넣어 중간 불에 서서히 끓였다. 한가로운 어느 날 꽁꽁 얼어붙은 빙판 위에서 여유롭고도 부드러운 동작으로 스케이트를 타듯이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한참을 저었더니 색이 진한 갈색으로 변하면서 생강물의 농도가 짙어지고 마침내 걸쭉한 상태에 이르렀다. 스파게티 소스가 담겨있었던 유리병을 씻어 중탕해 두었다가 그곳에 생강청을 조심스레 부었더니 한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생강청이 완성되었다. 생강청을 병째 식힌 다음 냉장고에 넣어 두고 물을 끓여 생강차를 한 잔 타 마셨더니 시간을 들여 직접 만든 것이라 그런지 맛이 더 훌륭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도 맛이 좋다고 하시며 앞으로 따뜻한 생강차를 마실 때마다 행복해질 것 같다고 하셨다.


이렇듯 행복이란 것이 소소한 일상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행복을 위해 뭔가 거창한 일을 꿈꾸기보다는 바로 눈앞에 있는 사소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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