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시를 매개로 자주 소통해오던 작가가 2020년 가을에 에세이를 출간했다. 하지만 나는 그해 봄 나 나름의 시련을 겪어내느라 그동안 소통의 창구였던 SNS를 모두 닫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2021년 가을이 시작될 무렵 걸어두었던 빗장을 제치고 다시 소통의 문을 열었을 때 작가는 누구보다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때 작가의 피드에서 에세이를 출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도 사유 깊은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봤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많은 배움이 되었던 작가였다. 이른바 작가의 글 솜씨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바 곧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쉬 읽지 못하고 어느새 3개월이란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수첩을 펼 때마다 읽을 책 목록에서 작가의 책 이름을 마주하다가 2022년 2월이 시작되자마자 드디어 책 장을 펼쳤다.
작가의 책을 읽기 전에 나는 한없이 아름다운 어느 시인의 사유 깊은 일상을 그려낸 에세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글이 아니었다. 예감할 수 없었던 글이 프롤로그에서부터 쏟아져 나오자 한순간에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뺨에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려 잠시 창문을 열고 먼 하늘을 한참 바라봐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순간부터 내 눈물의 통제권은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니었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기도 전에 내 눈물샘을 이토록 건드리는 것이라면 마지막 페이지에 무사히 닿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겪게 되는 슬픔에 관한 일들이 공평하게 배분되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런 일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닥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대개 가슴을 아프게 하는 그런 일들은 당사자에게 미리 준비하도록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사십도 안 되는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밤이면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삶이 바닥까지 내몰리는 상황을 겪었을 작가를 생각하자 애잔함이 몰려왔다.
패혈증으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어머니에게 작가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중환자실을 나왔던 이야기, 작가 역시 일 년을 간격으로 두 번의 큰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생사의 갈림길을 오락가락했던 이야기, 작가가 베푼 선의가 돌연 태세를 전환해서 오히려 작가에게 우울, 불면, 불안의 형태로 습격해 옴에 따라 결국 살기 위해 정신과 문을 두드렸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이 시대의 우리의 이야기.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공감이라는 센서가 스스로 깨어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마치 작가에게 응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문장이 끝나는 곳마다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으니까. 가슴에서 공감이 발하는 순간들이었다.
또한 글을 쓰는 입장에서 작가의 문장들을 유심히 읽어 내렸다.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문장들이었다. 작가는 어쩌면 유려한 문장들을 이토록 훌륭하게 엮어 놓았단 말인가. 궁금해지다가 수긍이 가고 결국 또 한 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무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라는 제목처럼 그 누구의 괜찮냐는 물음도 듣지 못하고 혼자서 아픔을 견디며 밤에는 죽음을 생각하다가 아침이면 다시 살고 싶어 하는 많은 보통의 그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을 생각하며 마음으로나마 그들에게 괜찮냐고 안부를 묻기 위해 오랜 시간 밤길을 걸었다. 오늘은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달과 별도 오늘만은 내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며칠 전에 건넌방 책장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세 권의 책들 중에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 있다. 2014년에 읽었다고 책 안쪽에 기록되어 있는 그 책을 그 자리에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부유한 도시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신과 치료를 하던 이른바 잘 나가는 정신과 의사 꾸뻬가 어느 날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행복의 비밀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책에서 행복은 목표를 정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겠다는 결심만 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나는 보통의 그들이 비록 이 순간 슬픔의 구간을 걷고 있다 할지라도 행복해지겠다고 결심하고 그 순간만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짧게나마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슬픔의 구간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테니까.
누나가 식혜와 잡채를 할 테니 와서 가져가라고 연락이 왔다. 누나가 즉석에서 잡채를 만들면서 하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누나는 최근에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소화불량으로 병원과 한의원을 지속적으로 다니며 치료받고 있었고 그러면서 거의 죽만 먹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비록 누나나 나나 음식을 많이 먹는 스타일이 아닐지라도 먹을 수 있는데 의도적으로 적게 먹는 것과 소화를 시키지 못해 못 먹는 것과는 천지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설을 지나면서 상태가 좋아져서 밥도 정상적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죽만 먹다 보니 살맛이 안 났다는 누나가 일요일에 조카와 함께 도시 외곽에 있는 아울렛 매장에 가서 자신을 위해 코트를 샀다며 보여주었다. 그동안 죽만 먹으면서 잘 견뎌낸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감동을 받아서 "누나, 정말 멋진 말이야. 순간순간 자신에게 잘했다고 칭찬하고 누나처럼 선물도 할 줄 알아야 해. 누나, 정말 잘했어." 그러자 누나가 덧붙였다. 여태껏 나 자신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고 선물도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도. 안 하던 일을 하려니까 어색하고 잊어버리기 십상이지만 그럼에도 행복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그래 우리는 이 생이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툰 게 당연하다. 그래서 누나 말처럼 행복해지고 자신을 돌보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을 끊임없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나는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밤길을 꽤 오랫동안 걸으며 용기를 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