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택씨와 첫의 갈등
그들에게도 냉전은 있었다
시간은 언제부터 아까운 것이 되었을까?
아주 어릴 때는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은 그냥 보내기 아까운 것이 되어버렸다. 빨간 벽돌을 으깨며 소꿉놀이를 하고 뒷산에 올라 바구니 가득 쑥을 캐며 하루를 보내던 어린아이는, 밥 먹는 시간을 아껴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한 문제라도 더 풀어야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는 고등학생이 되어있었다.
"살아보니 시간이 제일 소중한 것이더라. 아빠는 네가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아끼고 아껴서 쓰는 이유는 시간을 많이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어렸지만 나름의 확고한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전이 있었고 내가 원하는 목표를 원하기 위해서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는 과학과 수학을 좋아했다. 답이 명확한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다른 것들은 생각이 안 났다. 평생 수학 문제만 풀어야 한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하지만 수학 문제만 푼다고 누가 돈을 주지는 않는다. 문제를 잘 푸는 것과 내가 미래에 가질 직업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어 보였다. 공부 잘하는 이과생이 으레 꿈꾸는 의학계열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매년 3일에서 열흘 정도는 입원해서 병원신세를 지는 나로서는 병원은 멀면 멀수록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대생이 되고 싶었다. 포항에 있는 공대에 가고 싶었다. 남자가 많다는 것도 여중, 여고를 다니던 나에게는 커다란 메리트였다. 드넓은 잔디밭에 누워서 남자친구와 책을 읽는 상상을 하며 문제를 풀곤 했다. 별 일이 없다면 아마 박사까지 할 것이다. 나는 공부를 좋아하니까. 관심 있는 분야는 물리와 화학이었다. 나는 끈기가 있으니까 일단 입학까지만 성공하면, 그 뒤로는 다 잘 풀릴 것이다. 한 분야에 통달한 연구원, 박사님이 되면 충분히 내 인생을 잘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이제 수능 원서를 써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택씨는 갑자기 나에게 진로를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이유는 직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살아보니 '나의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 여자로서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할 때 공대는 너무 고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6년간 '장래희망'란에 온갖 연구원을 다 적어 냈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들이었다.
"그랬으면 진작에 말렸어야지. 지난 6년간 한 번도 내 꿈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않아 놓고. 왜 이제 와서 진로를 바꾸라는 말이야? 내가 그동안 편하게 살려고 공부한 것 같아?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려고 공부했지!"
마침 수리 '가'형(그때는 수리가 '가', '나'형으로 나뉘어 있었더랬다.) 점수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미분과 적분'은 아무리 공부해도 5문제 중 3문제를 틀렸다. 2학년까지는 늘 1등급이던 수리 점수가 3등급까지 떨어졌다. 택씨는 회복되지 않는 수리 점수 핑계를 댔다. 어차피 거기 가기에는 점수가 조금 모자라잖니.
"포항에 있는데 못 가면 서울에 있는데 가면 되잖아."
"아빠는 서울 국립대 아니고는 못 보낸다."
괜한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2주를 미분과 적분만 공부했다. 나머지는 2주 정도 쉬어도 무리 없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 있었다. 원서를 쓸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택씨와는 말도 섞지 않고 본 체도 하지 않았다. 한 여름이었지만 집 안에는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원서접수 마감을 이틀정도 남겨둔 어느 날, 갑자기 오여사가 나를 불렀다.
"아빠가 오늘 혈압이 올라서 잠깐 쓰러졌었어. 아빠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나 봐. 그냥 수리 '나'형 보고 교대 가는 게 어때?"
치사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치사함이었다. 아니, 건강악화 스킬을 쓰다니, 내가 뭐 편지 한 장 남기고 집을 나간 것도 아니고, 오토바이를 타다 다리 부러져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오여사 기준에 제일 큰 비행은 오토바이 탑승이다.), 친구들이랑 담배 피우다 학주한테 걸려서 전화 온 것도 아닌데! 수리 '가'형 보고 공대 가겠다는 게 택씨가 뒷목 잡고 쓰러질 만큼 큰일인 건가! 치사하다 치사해!
하지만 치사한 택씨를 첫은 이기지 못했다. 이게 다 내가 첫 번째라 일어난 일이리라. 다음 날 나는 울면서 담임선생님께 안타까운 비보를 전하고, 또 한소리를 듣고, 마음을 접는다. 첫째는 부모의 극렬한 반대를 꺾을 수 없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 같다. 이 또한 운명이겠거니 생각했다. 수리 '가'형을 포기하니 수능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놀라울 지경이었다. 수학 공부를 빼고 나니 시간이 넘쳐흘렀고 여유로운 마음까지 들었다. 수능은 쉬웠고, 그렇게 나는 서울에 있는 교대에 들어가게 된다.
"아빠는 그때 왜 나보고 교대가라고 했어?"
"네 체력에 일반 회사는 몇 년 다니다가 죽어버릴 것 같았어. 아빠는 그냥 네가 평범하게,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서 그랬어."
지금도 가끔 상상해 본다. 그때 내가 고혈압으로 뒷목을 잡고 쓰러진 택씨를 모른 척하고 그냥 공대에 갔더라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금보다 더 행복할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일까? 뭔가 더 대단하다 여겨지는 일을 하고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내가 정말 더 행복할지는 잘 모르겠다. 택씨의 권유로 들어간 교대는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고,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예상보다 더 내 적성에 맞았다. 그래서 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때의 선택이 바뀌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오랫동안 열망했던 길, 그러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아주 없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택씨의 바람대로 아주 평범하고, 아주 소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학교에서 스물두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친정에 들러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주에 3회씩 방송댄스를 배우면서, 아주 평범하고 소소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대단한 사람이 못 되었다는 아쉬움이 들다가도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아무 일 없는 하루하루에 문득 감사하기도 한다. '여자가 하기에 좋은' 직업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행복'이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넘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택씨는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실컷 마주 보며 맛있는 것을 먹는 시간을 주고 싶었나 보다. 저녁이 있는 삶 말이다. 살아보니 택씨의 치사함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라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껏 부대끼며, 아주 맛있는 것을 먹고 있다.
오늘은 택씨가 삶아준 수육을 첫과 둘, 그리고 네 명의 손자들이 아주 맛있게 먹었다. 택씨는 아직 젊은 할아버지이고 어느새 가슴팍까지 커버린 장손과 여전히 레슬링을 즐길 만큼의 체력이 있다. 6살과 4살인 꼬맹이들과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찌르는 놀이를 하며 할아버지의 민첩함을 자랑했다. 나는 그 순간들을 눈에 담으며, 또 기억하려 애쓰며, 택씨의 선택이 아주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고 또 생각했다.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감사함으로 마무리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