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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둘셋 Jan 17. 2024

8. 사소한, 조각들 모음

사물함 뒤편을 정리해 보자.

 매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빠지지 않고 꼭 하는 일이 하나 있으니 바로 '대청소'되시겠다. 평소에는 아이들이 대충 쓸고 대충 닦아도 어느 정도는 못 본 체하고 그냥 넘어가지만,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시즌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일 년 내내 쌓인 먼지들을 다 닦아내야지만 비로소 그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열한 살쯤 먹은 아이들은 생각보다 청소를 잘하는데, 누구누구는 쓸기, 누구누구는 옮기기, 누구누구는 닦기 이렇게 역할만 제대로 정해주면 맡은 구역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학년 마지막 대청소는 구역별로 서로 경쟁하고 협동하며 모두가 즐겁게 해내는 게 꼭 체육대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신기하기도 하다. 일 년간 합을 맞춘 친구들과의 마지막 모둠과제이자 후배들을 위한 마음의 멋진 조화 같달까?


 그중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은 일 년간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던 교실의 가구들을 옮기고 그 자리의 먼지를 쓸고 닦는 일인데, 특히 사물함 뒤가 제일 재미있다. 교실 맨 뒤켠에 길게 늘어져 있는 사물함을 하나하나 빼보면 그간 잃어버린 물건들이 한가득 나온다. 자석이 박힌 조그마한 바둑알 무더기부터 시작해서 색색깔의 유성매직들에 누군가의 리코더까지, 없는 게 없다.

 "아, 이거 잃어버렸었는데 여기 있었네."

 "이거 주인 누구야~ 없으면 서랍장에 정리해 둔다!"

 "선생님, 이 카드들은 보드게임함에 정리할게요."

 아이들은 보물선에서 보물이라도 찾듯 먼지가 앉은 물건을 이리저리 들춰보며 이 과정을 즐긴다.

 "아, 선생님! 여기 껌 붙어있어요! 안 떼져요."

 물론 꼭 보물만 있지는 않다.


 나에게도 어지러운 사물함 뒤편 같은 기억들이 있다. '얘가 왜 여기 떨어져 있지?' 싶은 기억도 있고, 더럽게 눌어붙어 잘 지워지지 않는 기억도 있다. 어쩌다 그 속으로 굴러들어갔는지도 모르고, 어떤 서랍장에 정리를 해야 할지도 모를 무언가의 조각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일단 한번 들춰보았으니 하나하나 꺼내보자.


 5살의 나는 아직 쇳소리가 나지 않는 조용한 택씨의 작업장에 있다. 훗날 택씨의 작업장에서는 거대한 두 개의 기계가 들어오게 되는데, 이 기계들은 커다란 원판 두 개를 두른 기다란 톱날을 쉴 새 없이 돌리며 기다란 철근들을 일정한 모양으로 잘라냈다. 워크맨으로 노래를 들을 때 카세프테이프가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기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할 것이다. 나는 쇠 자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톱니들이 돌아가며 철근을 자르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우유같이 생긴 하얀 액체들이 쪼르르 흐르며 바닥에 톱밥 같은 철가루들이 쌓이는 게 꼭 모래시계 같았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이 기계들이 가동되기 전, 택씨의 사업장이 문을 열기 전의 기억이다.


 택씨는 가끔 신이 나서 나에게 뭔가를 제안하곤 했는데 그날은 참새를 잡아보자며 집에 있던 나를 불러냈다. 왜 갑자기 참새가 잡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장난꾸러기 같은 눈빛을 하고선 나에게 참새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여기에 쌀알을 뿌려 놓고, 바구니를 막대기에 걸쳐 놓을 거야. 그리고 막대기에 줄을 묶어서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거지. 그러면 참새가 우리가 지켜보는 줄 모르고 쌀알을 먹으러 올 거야. 참새가 쌀알을 먹다가 바구니 밑에 들어가는 순간! 줄을 잡아당기면 참새를 잡을 수 있는 거지."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택씨는 말을 이어나가며 덫을 설치했고, 나는 내 눈빛도 택씨의 눈처럼 빛나기를 바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바구니로부터 한참을 떨어져 쪼그려 앉아 참새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조용히 기다리던 와중에도 신이 난 택씨는 자꾸 들썩거리며, 숨을 죽였다가, 또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세 딸 중에 나만 데려온 이유는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있을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아이는 나뿐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참새가 오든지 말든지 딱히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냥 택씨랑 같이 쪼그리고 앉아서 조금은 바보 같은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 재미있었다. 그날 결국 참새는 한 마리도 오지 않았지만 실망은 오히려 택씨가 한 것 같았다. 택씨에게 정말로 이 방법으로 참새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택씨의 동심으로 남기기로 하며 꾹 참았다.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기억이 있다. 내가 한국나이로 5살이었으니 둘은 3살, 셋은 겨우 1살이었다. 셋이 돌은 되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한 번이라도 육아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 시기의 아이들을, 그것도 셋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을 하려나 모르겠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의 새해 소원이 '안 깨고 3시간 이어서 자게 해 주세요.'였다면 조금 이해가 되려나. 무튼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을 키우는 택씨와 오여사는 아주 많이 힘이 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푹 잔 것은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겠지.


 우리 집은 단 한 번도 분리수면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 다섯 명이 모두 한 방에서 잠을 잤다. 물론 나는 다들 엄마 아빠랑 같이 자는 줄 알고 컸는데 14살까지는 한 방에서 이불을 펴고 다 함께 잠을 잤고, 15살부터는 퀸사이즈 침대가 하나 생겨서 선착순으로 3명은 침대에서 자고 나머지 둘은 바닥에서 잤더랬다. 사실 선착순은 아니고 보통 엄마 아빠가 침대에서 먼저 잠이 들면, 한 명이 그 사이에 끼고, 또 한 명이 그 사이에 끼면 엄마나 아빠 중 불편한 사람이 밑으로 내려가고, 또 마지막 한 명이 또 끼면 불편한 누군가가 밑으로 내려가서 자게 되는 매우 불합리한 시스템이었다. 왜 굳이 불편하게 침실 분리를 안 했냐고 물었더니 오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 가족이 다 같이 침실을 쓰면 애들 사춘기도 별로 안 힘들게 넘어간다고 그래서 그랬지."

 그래서 정말 택씨와 오여사가 평온한 애들 사춘기를 맞이했는지는 비밀로 하겠다.


 분리수면이라도 하면 좋았으련만, 셋 중 누구라도 떼어 놓았으면 좋았으련만. 이제 겨우 한 살인 셋은 밤마다 울기 일쑤였고, 울음 끝이 조금이라도 긴 날에는 둘도 나도 잠을 깨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밤잠을 자주 설쳐서 아기 때부터 오여사를 한숨도 안 재웠다고 그랬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날은 셋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택씨의 고함소리에 잠이 깬 것 같다. 택씨는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베개를 던졌고, 나는 자다가 깨서 황망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오여사는 계속해서 울고 있는 셋을 달랬고, 나는 상황파악에 실패하고 눈치를 살피며 알쏭달쏭해하다 다시 잠이 들었다. 한밤중의 고성에 놀란 그날 밤은 꽤 오랫동안 기억 속에 있었고 훗날 유추해 보건대 매일 밤마다 들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분을 이기지 못한 택씨의 이성이 끊어진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런 일까지 기억하리라고는 택씨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 부모란 얼마나 큰 책임감을 지고 가야 하는 역할일까.


 마지막 조각은 매우 사소한데 그래서 더 신기하다. 나는 6살이었고, 집에 엄마는 없었으며, 나는 똥을 쌌다. 그래서 무슨 말이냐고? 6살 아이는 스스로 똥을 닦을 줄을 모른다. 큰일이 난 것이다. 나는 그때 집 앞마당에 따로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는데 그 화장실의 변기는 요즘 집에 있는 양변기가 아니라 슬리퍼처럼 생긴, 앞은 막히고 밑은 뚫려있는 옛날 변기였다. 집 안에서 쌌더라면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이 오여사를 기다릴 수 있었을 테지만, 쪼그려 앉은 내 다리는 벌써 저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택씨에게 똥 닦는 일을 맡긴 적이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택씨를 부를까 말까, 그 짧은 시간에 수백 번도 더 고민한 기억이 생생하다. 스스로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똥은 누군가 당연히 닦아주는 것이니까.

 "아빠~"

 하고 조심스레 불러보았다. 사무실에 있는 택씨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아빠~!!!"

 이번엔 좀 더 크게 불러보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보다 저려오는 다리가 더 급했다.

 "아빠!!!!!!!!!!!"

 난 정말 간절했다. 누구라도 내 똥 좀 닦아주세요.

 그때 문이 열리고, 택씨가 보였다.

 "아빠.... 똥 닦아 주세요....."

 택씨의 표정이 정말 재미있었는데, 완전히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이었다. 할 줄 모르는데, 해야 하는 일을 맡은 사람의 표정. 출생신고를 처음 해보는 갓 발령 난 면사무소 직원 같은 표정. 뭐, 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빠에게 엉덩이를 보이다니! 나는 꼬마 숙녀인데!

 우리 사이엔 꽤나 긴 정적이 흘렀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고, 택씨는 더럽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하루빨리 오여사에게 똥 닦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자, 됐다."

 택씨와 눈을 마주쳤는지, 못 마주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뒤로 택씨가 나의 똥을 닦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아빠라도 다른 사람에게 엉덩이를 보이는 일은 부끄러우니 말이다.


 사물함 뒤편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쌓여 있다. 어떤 순간은 먼지만 툭 털어내도 다시 빛이 나고, 어떤 순간은 끔찍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씩 들여다보고 정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도 할 것이다. 오늘은 이만큼 찾아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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