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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둘셋 Feb 02. 2024

9. 택씨의 반쪽, 나의 엄마(2)

엄마 같은 엄마는 못될 거야 나는...

 OECD도 놀란 한국의 출생률에 관한 다큐들이 쏟아지고 있다. 저출생, 인구감소를 넘어 인구절벽, 인구멸절이라는 급박한 단어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사실 젊은이들은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보다 당장 내 미래가 혼란한데 인구멸절을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정치권에서는 각종 혜택과 정책들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 애쓰지만 '애를 낳는데'에만 신경을 쓴다고 과연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한 낮은 출생률의 원인 중 하나는 교육이다. 물론 높은 부동산 가격, 치열한 사회 분위기, '평균' 수준의 상향화, 남녀갈등 등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지만, 우리가 초중고 12년을 거쳐 대학교 4년까지 받게 되는 교육에 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단 한 번도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교육이나 바람직한 가정의 모습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미래 모습을 상상할 때 또한 나의 진로, 직업인으로서, 전문가로서의 모습만을 그리며 치열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열심히 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원이 되기 위해 혹은 자아실현을 위해, 아니면 부자가 되기 위해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온 개인에게 출산과 양육이란 그저 하나의  커리어 리스크에 지나지 않는다. 여태 괜찮은 직업인으로서 사회화를 다 시켜놓고는 갑자기 당신의 모든 것과 맞바꿀 가치가 있는 자녀를 낳아 부모로서의 삶을 살아보라는 권유는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은 너무 한정적이고 제각각이다. 아이들은 평균적인 혹은 바람직한 가정의 모습을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이 처한 환경이 보편적이겠거니 하며 살아가게 된다. 자신이 방임이나 학대를 당하고 있더라도, 아주 나중에서야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혹은 매체를 통해 어렴풋이 느끼게 될 뿐이다. 그러니 각기 다른 가정에서 살아온, 보편적이거나 평균적인 '기본'이 존재하지 않는 개인과 개인의 결합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이다.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를 따지기로 치자면 결국에는 우리 집에서는 이것이 규율이었음을 근거로 하며 서로의 부모를 들먹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 모든 갈등과 조율을 개개인의 몫으로 온전히 남겨두고, 출산과 양육에 대한 목적이나 실상조차 누구도 일러주지 않은 채, 어찌어찌 이만큼 굴러온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나의 경우는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회에서는 나의 소속과 역할이 분명했고, 일을 못하지도 않았기에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도 했다. 매일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이 끊이지 않았고, 말 잘하고 분위기를 잘 주도하는 인싸라고나 할까. 그랬던 내가 아이를 낳으니 모든 능력치가 0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겨우겨우 이 세계에서 레벨 올려놓았더니, 갑자기 맵이 바뀌며 레벨 1로 떨어진 기분. 진짜로 공부'만' 했던 나는 육아는 물론이오 기본적인 집안일조차 버벅거렸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하루종일 집에서 애랑 '노는', 세상 한심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육아나 집안일 자체의 스트레스보다 이 간극에서 느껴지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괴리감이 너무 커서 한참을 우울증에 빠져 살았더랬다. 이 맵에서 유용한 기술이나 멘탈관리법은 어디에서도 나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반면 오여사는 굉장히 헌신적인 엄마였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친절하고 따뜻했으며, 둘째를 너무 혼내지 않는다는 점과 내 얘기를 허락받지 않고 본인의 친구들에게 한다는 점만 빼면 나머지는 대체로 좋았다. 오여사는 특히 자신의 관심과 희생을 먹을 것으로 자주 표현해 주었는데, 먹을 것이야 말로 가장 원초적인 행복과 만족의 근간이 되는 것이기에 나의 유년기는 늘 든든하고 안정적이었다. 오여사는 내가 반장이 되면-그때는 월마다 반장이 바뀌었었다-손수 만든 샌드위치를 반 전체에 돌리곤 했는데, 40명이 넘는 학생에 학년 선생님들의 몫까지 밤새 예쁘게 포장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명절에는 꼭 마트에는 팔지 않는, 라벨이 없는, 하얀 유리병에 담긴, 누군가가 생산부터 판매까지 직접 했을 법 한 참기름을 한지로 포장하여 선생님들께 선물을 돌렸다. 급식이 안 나오던 중고등학교 시절엔 같은 반 친구가 "쟤네 엄마처럼 도시락 싸주면 나도 전교 1등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책가방보다 도시락가방이 무거웠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점심시간 전에 배고플 때 먹는 간식, 점심 먹고 나서 먹는 간식까지 살뜰히 챙겨주던,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용돈을 받을 필요가 없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오여사가 얼마나 나를 애지중지 키웠는지 알겠는가.


 둘은 늘 공부를 하기 싫어했는데 오여사가 공부하라고 들어가라고 하면 그때마다 "엄마, 배고파!"를 시전 했다. 누가 봐도 공부하기 싫어서 하는 '배 아파', '머리 아파'와 같은 말이라는 걸, 고작 두 살 위인 나도 눈치챌 정도로 변함없었는데, 정말이지 오여사는 그 말을 단 한 번도 허투루 들은 적이 없다. 방금 밥을 먹었을지언정 다시 배고프다 떼를 쓰는 둘을 앉혀다가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서 "이제 그만 먹을래." 소리가 나올 때까지 먹이고 또 먹였다. 또 우리 택씨는 어떠한가. 젊은 날의 택씨는 대부분의 날들을 친구들과 술 한잔 걸치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지만, 가끔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프랑스인이 따로 없었다. 전채요리부터 시작해서 반주와 함께 메인디쉬를 즐기고, 이제 식사가 끝났을까 싶은 순간에 꼭 입가심으로 밥 한 공기에 김치와 밑반찬을 곁들인 뒤, 입가심으로 디저트까지, 하나의 예술작품을 완성하듯 매 식사를 공들여 즐겼다. 두세 시간씩 이어지는 식사시간은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었고, 택씨가 식사를 마무리하기까지 오여사는 늘 분주히 부엌과 식탁을 오갔다. 택씨가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서 술자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었다. 오여사가 전화를 받더니 지금부터 너희들이 도와줘야 한다며 분주히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나의 역할은 술안주로 먹을 꼬치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기다란 꼬챙이에 메추라기알과 비엔나 소시지 그리고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꽂아 쟁반에 담아냈다. 오여사는 해파리무침과 무쌈말이를 굉장히 예쁘게 만들었었는데, 덕분에 나는 톡 쏘는 겨자 맛에 일찍 눈을 떠서 입맛이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종종 듣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여사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나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다. 택씨의 손님이 온다거나, 부득이하게 우리 셋만 집에 남겨진 상황이 아니고서는 나에게 청소, 빨래, 설거지 등의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가끔 양말 짝 맞추기 게임을 하자며 우리 셋을 잔뜩 쌓인 빨래 더미 앞에서 경쟁을 시키곤 했지만 그건 정말 소소한 일이었다. 오여사는 나에게 늘 말했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열심히 공부해서 집안일 같은 것은 다른 사람 시키고 너는 사회에서 일을 하라고. '나중에 시집가면 다 하게 되니까 지금은 하지 마.'였다면 내가 조금은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습관처럼 말하던 저 문장 덕분에 나는 정말로 오여사보다는 택씨를 모델링하여 자라게 된 것 같다. 지금 내가 만든 가정에서 나의 역할을 살펴보아도 대부분 택씨가 우리 원가정에서 보여주던 모습들이다. 밖에서 돈을 버는 것, 운전을 하는 것, 여행을 계획하는 것,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고 밤늦게 집에 귀가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정말 오여사의 말대로 집안일은 '이모님'께 외주를 맡기고 있다. 잔잔한 집안일은 남편이 다 하고, 화장실 청소나 이불빨래 같은 굵직한 일들을 이모님께서 다 해주신다.


 집안일은 생각보다 집안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굉장히 섬세하고 반복적인 노동이었으며, 열심히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거지 같은 일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엄마'가 되면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은 집안일들을 어쨌거나 저쩠거나 스스로 척척 해낸다는 데에 굉장히 놀랐으며, 반면 나는 매일 반복해야 하고, 정확한 보상구조가 없으며, 타인의 인정이 없고, 세세한 지시가 없는 열린 노동을 굉장히 어려워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집안일에 있어서의 나는 멍청이 었으며, 친구들의 집을 놀러 갈 때마다 정리학과 석사학위라도 받았나를 궁금해하며 이 세계에서 자아존중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고꾸라져버렸다. 명확한 성취를 통해 칭찬과 보상을 받는 구조에 익숙하게 길러진 나는, 그렇게 헌신적인 오여사를 보고 자랐음에도 스스로를 '엄마'로 모델링하지 못하고 '난 아빠야!'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에 오여사의 성취는 무엇이었나 궁금하다. 우리의 키가 자라면, 몸무게가 늘어나면 뿌듯했을까. 우리가 학교나 유치원에 간 사이 깨끗해지는 화장실 타일을 보며 만족했을까. 아니면 나의 성적이 오르면 그것이 자신의 성취처럼 느껴졌을까. 자식의 인생은 자식의 인생이고,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자식을 나의 성취나 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 당근 없는 채찍질의 연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난 엄마보다 더 똑똑하고 알아서 잘 공부하니까, 엄마는 이제 내 성적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며 쏘아붙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진짜 공부를 잘했고, 진짜 싸가지가 없었고, 진짜 나만 잘났었다. 오여사 개인의 어떤 사회적 보상을 포기한 희생과 사랑이 없이는 그렇게 공부'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모르는 어린애였으니 말이다. 스스로 독립을 해서 화장실에 피는 곰팡이와 옷장에 피는 곰팡이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엄마'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줄 알았던 첫은 여전히 이 분야의 레벨 0, 초심자이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애매한 레벨로 방황하는 나는 새삼, 당연히 자신의 삶을 갈아서 나의 우주가 되어준 오여사와 택씨에게 감사하다. 나의 우주는 이렇게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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