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천과 바람이 없어도 너에겐 두 다리가 있단다
2011년은 여러모로 우리 가족에게 의미가 있었던 한 해이다. 가족 모두에게 의미 있는 변화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먼저 택씨와 오여사는 2011년을 맞이하여 본격적인 자발적 백수의 삶을 시작한다. 10화에서 언급했듯이 오랫동안 병간호를 했었던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택씨는 사업을 슬슬 정리하기 시작했고, 새해를 맞이하여 본격적으로 부부의 안식년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무서운 타이밍으로 첫은 그 해에 임용에 합격하여 사회인이 되었고(하지만 6개월간 임용 대기자 신분이었다), 둘은 갑자기 서울대 교환학생에 합격하여 서울대생(6개월 한정)이 되었으며, 셋은 대학교에 입학하며 성인이 되었다. 모두의 신분에 지각변동이 생긴 놀라운 해였다.
임용 준비생이 임용 대기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지방대생이 서울대생이 되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고3 수험생이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하지만 누가 제일 신이 났을까? 평생 동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해서 일하고, 토요일에는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일요일에 겨우 하루 쉬던 택씨와 오여사가 제일 신이 나지 않았을까? 이 모든 정황들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이다. 지금 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된다. 드디어 우리는 1박 2일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단단히 고삐가 풀렸다. 이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로 한 우리 가족은 첫 번째 여행지를 택씨와 오여사의 신혼여행지로 선정한다. 바로 제주도. 제주도는 나와 둘에게도 의미가 있는 여행지였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스물두 살, 스무 살, 혈기 넘치고 돈은 없던 첫과 둘이 당차게 2박 3일 자전거 일주를 선포하고 떠났다가 실패하고 하루 만에 돌아온 비운의 섬이었다. 체력이 남달랐던 둘은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여객선 터미널부터 해안도로를 타고 중문까지 하루 만에 내달렸으며, 체력이 남다르지 않았던 첫은 삼각김밥 2개 먹고 이어지는 강행군을 버티지 못하고 중문의 한 펜션 바닥에서 밤새 근육통에 시달리며 울부짖었다고. 얘를 따라가다는 다신 못 걷게 될지도 모른다고 현명한 판단을 내린 첫은 날이 밝기 무섭게 서울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고, 둘을 제주도에 남긴 채 홀로 상경하여 바로 정형외과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어떻게 언니가 돼가지고 이제 막 성인이 된 동생을 섬에 버려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돌아올 수가 있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오여사 때문에 한동안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씩씩했던 둘은 혼자서 남은 일정을 버스여행으로 마무리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야심 찼지만 서로의 체력에 대해 오해가 있었던 이들은, 다시 한번 가족여행을 통해 제주도에 대한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있었을까?
첫 3박 4일 가족여행. 저번에는 돈도 없고 차도 없었지만, 지금은 돈-이 있는 부모님-도 있고 차-가 있는 부모님-도 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제주도 여행을 하겠구나, 잔뜩 기대에 부풀어 여행을 시작했다. 제주도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고, 경치가 얼마나 좋고, 예쁜 카페가 얼마나 많은지는 물론 조사하지 않았다. 어차피 운전대는 택씨가 잡고 있고, 돈도 택씨가 가지고 있고, 이 여행의 주도권을 모두 택씨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 가족 간의 사랑은 돈독했지만, 서로의 여행스타일은 전혀 몰랐던-우린 이전에 1박 이상의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이들의 여행은 당연하게도 파국으로 치닫는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또 한 번 택씨와의 여행은 두 번 다신 없다고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택씨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택씨가 이렇게까지 걷는 것에 진심인 줄은 몰랐다. 3박 4일이었던 여행에서, 가는 날과 오는 날을 제외하면 이틀뿐인데, 이 이틀을 온전히 걷는 데에 썼다면 믿겠는가. 도대체 왜 택씨는 평생 고생한 자신에게 수고했다며 주는 선물 같은 여행에서 걷기만 하고 돌아가는 것인가!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대표 휴양지가 아니던가. 왜 택씨는 휴양지에서 쉬지 않고 걷는 것인가!
우리가 하루종일 걸었던 곳은 올레길 7코스였다. 그때 한창 올레길 바람이 불어서 걷는 게 유행이긴 했다. 나도 예쁜 전경들을 바라보며, 오여사와 함께 예쁜 사진을 찍으면서 하하 호호 걷는 것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 길이 왜 끝나지 않는단 말인가. 왜 길이 아닌 곳에 자꾸 화살표가 있냐는 말이다. 그래도 한 시간 까지는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두 시간 까지는 "여기 길 맞아? 길이 왜 이렇게 험해?" 하며 투덜대기도 했다. 세 시간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치도 보지 않았다. 땅만 보고 걸었다. 택씨는 자꾸 금방 도착한다고 했다. 택씨는 자꾸 멋진 생각들을 해보라고 종용했다. 택씨는 자꾸 이 멋진 경치를 온몸으로 느끼라고 했다. 스마트폰이 이제 막 보급되기 시작해서, 나만 겨우 아이폰4를 들고 있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아무 지도나 켠다고 근처에 맛집이나 평점들이 보이던 때가 아니었다. 제주도 여행만을 전문으로 하던 어플을 켜서 아무리 찾아봐도 올레길 주변에 제대로 된 밥을 먹을 곳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택씨는 이 경로를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길바닥에 그려진 파란색과 주황색 구불거리는 화살표 표시만을 신뢰하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반갑고 귀여워서 만날 때마다 찍던 화살표들을 다 바다에 던져서 없애버리고 싶을 때쯤 돼서야, 제주도를 제대로 느끼라고 만든 것인지 어디 한 번 죽어봐라 하고 만든 길인지 의심하던 것이 확신이 될 때쯤 돼서야, 올레길을 처음으로 기획하고 실현한 사람이 누군지 한번 만나면 용서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쯤에야 7코스를 완주했다. 택씨는 뿌듯해했고, 둘은 가뿐해 보였으며, 나는 매우 화가 났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이 여행을 망칠 수 없다. 우리 가족의 행복한 첫 가족여행이니까^^
그렇지만 다음날 한라산 등반은 좀 아니지 않나. 물론 나도 기대가 아주 안되었던 것은 아니다. 한라산이 그렇게 높을 줄 몰랐던 것뿐이지, 한라산에서 만나게 될 다양한 식물들에 대한 자료를 모을 생각에 한껏 들떠있었다. 4학년 과학교과서에 여러 환경에 서식하는 식물들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 고도별로 식물들 사진을 찍어 수업자료로 쓸 예정이었다. 택씨는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긴 하지만, 어차피 중간까지는 차로 가서 시작하니 별거 아니라고 했다. 새벽에 깨웠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데, 난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걸까. 역시 처음에는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정말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른 식물군들이 나오는데 생물책에서 본 것처럼 선이라도 그어진 듯이 나뉘는 게 신기했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라면을 먹는데 행복했다. 아, 이거지. 그런데 다들 알고 있으려나,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걸.
사실 라면을 먹을 때 나의 등산은 끝이 났다. 원래도 남 보다 못한 체력의 소유자인 내가, 지난 1년 임용을 준비하겠다고 책상에 앉아만 있었으니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칭찬의 손뼉 쳐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택씨는 계속해서 앉아있는 날 재촉했다. 지금 올라가지 않으면 백록담을 볼 수 없다, 일어나거라 딸아.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 올라가니 바람이 매섭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되었다. 울창하던 나무들은 다 어디 갔는지 어느새 황량해진 산봉우리는 지푸라기 같이 생긴 풀들만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바람은 싸다구를 날리고, 머리칼은 눈을 가리고, 다리는 후들거리는데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은 다 저만치 앞에 가고 있다. 좀 쉬어가자고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도 부는 바람에 부딪혀 닿지를 않았다. 혼자 남겨질 수 없다는 의지였는지, 혼자만 남겨질 것 같은 불안이었는지, 젖 먹던 힘은 이런 거구나 느끼며 결국 나는 정상에 도착했고, 백록담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아니 내가 힘들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엄마 아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먼저 올라가 버리는 거야? 그리고 이거 백록담 보고 싶겠지만, 이거 그냥 구덩이고만 이거 본다고 딸은 내버려두고 자기들끼리만 올라가 버리고, 그러는 게 어딨어! 나 진짜 힘들다고, 아 못내려간다고오."
뭐 대충 이렇게 말하면서 울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오열을 하며 말해서 "아아니, 흑, 내가아, 엉, 어? 으흑, 힘들다고오오오, 흐아아앙" 이런 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열받는 것은, 내가 이렇게 오열을 하고 있는데 오여사는 나를 진짜로 빤-히 바라보더니 홱 돌아서 하산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응? 엄마, 나 울고 있다니까? 그래서 뭐 어떻게 되었냐고? 그냥 엉엉 울면서 따라 내려갔다. 막 "아 진짜 힘들다고 오오 어어 엉엉" 이렇게 울면서 내려간 것 같다. 하산을 마치고 나서는 다행히 진정이 되었고, 그렇지만 스물네 살 가녀린 첫의 마음에는 부모에 대한 불신이 다시 싹트기 시작했고, 오여사는 다만 나이 먹고 산 정상에서 울어재끼는 딸내미가 너무 부끄러워서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내려왔다고 진술하였다. 힘든 것을 힘들다 말하지 못하다니, 우리 사이엔 두 번 다시 여행은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밤새 손절을 다짐했더랬다.
여전히 제주도는 내게 쉼과 휴양의 섬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의 땅으로 기억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제주도만 가면 전에 없던 멀미와 두통이 생겨 호텔 방을 나오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크나큰 정신적 스트레스가 자리 잡은 모양이다. 물론 우스갯소리이다. 가족여행 손절을 다짐한 지 두 달 뒤, 우리 가족은 다 같이 울릉도와 독도로 가족여행을 떠났고, 잘 놀고 왔다. 가족끼리 싸움은 칼로 물베기지 그럼. 그리고 또 2달 뒤, 오여사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는 택씨를 보며 그의 걷기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오여사는 생에 첫 해외여행을, 굳이, 꼭 한 달씩 스페인에서 걷다 와야 하냐고 여러 번 물었지만, 이 여행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엄마 아빠의 좋은 추억이 된 것 같다. 이 정도면 우리 택씨, 월드클래스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