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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감상편

죽음이란

by 첫둘셋

103페이지의 얇은 책.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이반 일리치나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가 아니라 김준철, 이신혜 같은 것이었다면 83쪽으로 마감을 칠 수 있었을 법한 책. 하지만 이 책은 거의 20여 년 만에 나의 인생 책을 갈아치우게 된다. 이미 40페이지 즈음을 넘길 때부터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절필해야겠다! 내가 쓰는 건 다 똥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톨스토이. 그래, 톨스토이보다 내가 잘 쓸 수는 없다.


이전의 인생 책을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데미안'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하지만 '데미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인생 책일 정도였냐 묻는다면 사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성인 ADHD에 가까운 나는 사실은 책을 읽으며 하는 생각, 사유, 감탄의 반 정도는 책장을 덮으며 잊어버리고,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그에 관한 사유를 했다는 사실조차도 잊는다. 나는 내가 글로 표현하는 것의 50배 이상의 생각을 매일 하는데, 주제도 너무 다양하고 샛길로 빠지기도 자주 빠져 뭔가 커다란 생각도, 심화된 중요한 생각도 늘 잃어버리기 일쑤이다.('잊'어버리기가 맞춤법이 맞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만, '잃'어버리는 정도의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여하간 그래서, 굳이 굳이 읽은 책의 내용을 필사를 하고, 굳이 굳이 읽고 나서 감상을 쓰는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가 "나는 그 책 별로던데, 너는 뭐가 그렇게 좋았어?"라고 물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하고 싶어서. 그냥 좋더라, 나는 그쪽이 좋은 가봐, 뭐 이런 말로 때우고 싶지 않아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나를 이렇게 매료시킨 것은, 이 짧은 분량의 소설에 거의 대부분의 소위 '괜찮은 삶'의 모습을 그려놓았다는 점이다. 총 12장으로 구성된 소설에서 병들기 전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21p 인용)' 이반 일리치의 삶은 2장과 3장, 단 두장에 걸쳐서 소개된다. 하지만 그 두 장 안에 우리 모두의 삶이 들어 있다. 놀라울 정도로 문장을 잘 쓰는 톨스토이는 1800년대에도 얼마나 인간들이 소름 돋을 정도로 지금과 별 다를 것 없이 사는지를 보여준다. 어떻게 무려 200년 전의 인간이, 어제 썼다 해도 손색이 없을 삶을 그려낼 수 있을까? 자본주의,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어쩌고 저쩌고 해도 결국 인간의 삶이, 욕구가,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요즘말로 완벽한 육각형 남자인데, 괜찮은 집안에, 서글서글한 성품에, 못지않게 뛰어난 능력에, 적당한 야망에, 선을 넘지 않는 유희에, 상류층 여성과의 결혼까지 이뤄낸, 갓벽한 인생의 표본이다. 물론 결혼 후 맞닥뜨리는 아내와의 갈등에서 회피해 버리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남편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실패를 제외하고는 훌륭하고 치열한 인생을 살아낸 인물이다. 그에 관해 서술되는 표현들이, 나의 삶을 서술하는 표현들과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을 때, 거의 다를 바 없다는 점에 톨스토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약간의 차이일 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반 일리치는 '나'로 대체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물론 '내'가 아닌 '누구'라도.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 점을 참을 수 없어했는데, 결국 해 아래 새로운 삶이 없다는 점이었다. 나의 고민은 이미 누가 했던 고민이고, 내가 푸는 문제는 이미 500년도 전에 풀렸으며, 1000년 전의 생과 나의 생의 다름은 겉으로 보기에, 그리고 사회적으로 명명된 계급의 차이가 존재하느냐 마느냐 정도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생은 극한의 풍요가 낳은 축복받은 생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모르긴 모르지만 나는 조선의 모든 왕들보다 맛있는 산해진미들을 맛보고 있으며, 이집트의 파라오보다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으며(물론 실내에서), 칭기즈칸보다 더 멀리 여행할 수 있고, 진시황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과학 문명이 정점을 찍어 모든 고민들이 사소해지는 시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 200년 전의 사람들보다 철학적으로 그렇다 할 진보 없이, 어쩌면 그저 이전 시대의 최고위층들이 누리던 것들을 태어날 때 좌표 설정 잘 한 덕에 스스럼없이 즐길 수 있는, 되게 평범하고 그저 그런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렇다면 나의 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것이 나의 태초의 질문이다. 관성에 따라, 어머니의 어머니가 어머니를 낳은 연유의 반복으로, 보기 좋은 굴레들을 착실히 꿰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인가,에 대한 것.


게다가 이반 일리치는 4장이나 돼서야 자신의 질병과 죽음을 생각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는 늘 죽음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를 비좁고 깊고 검은 자루 속에 아프도록 처박은 채 자꾸 더 안으로 쑤셔 넣지만 도무지 들어가지 않는 듯한 느낌'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느끼던 감각이다. 이미 11살 즈음에는, 이런 식으로 오래 살 바에는 그냥 모든 기능이 정상일 때 고통 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보다 건강한(보통 모두가 나보다 건강했다.) 또래의 친구들에게 말도 안 되는 질투를 느껴 그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몸은 비록 제일 약했지만, 마음만큼은 제일 약하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타인에게 감정을 덜 주고, 유익하고 유쾌한 것들만 챙겼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닫아버렸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 따위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몸은 아무리 아파서 뒤집어져있어도, 마음만큼은 내가 제일 단단하고 싶어서. 병원에 들어서면 익숙하게 느껴지는, 오래 묵힌 알코올램프에서 새어 나올 법한 냄새는 역하지만 이내 안정감을 주었다. 응급실에서 접수를 마치고 침상에 누우면 비로소 '이제 살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들 진료를 보러 소아과에 가서 쉴 새 없이 이 방, 저 방에서 울어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공황발작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나에게 병원은, 질병은, 죽음은, 너무나도 가깝고 오래 묵힌 감각들이다.


게다가 나의 할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할아버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모진 세월과 차별을 이겨내고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 자수성가에 성공한 강한 남자. 자식들을 비롯해 손자, 손녀들에게도 집을 한 채씩 해주실 정도의 재력가. 물론 내가 어릴 때 집안이 크게 망해버려 기억이 나는 것도, 현재 남은 것도 없지만, 이런 할아버지를 두었던 턱에 나의 유년기는 부잣집 막내아들의 첫째 딸 그 자체였다. 부유하고 유복했다. 할아버지는 특히 날 아끼셨고, 내 세상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항상 예쁜 옷을 입었고, 항상 맛있는 것을 먹었고, 항상 백화점으로 산책을 갔다. 수영장이 있는 유치원을 다녔는데, 우악스러운 동생 한 명을 빼고는 모두가 친절하고 예쁘고 잘생겼었다.


하지만 내가 막내아들의 첫째 딸이어서 일까?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 되었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두 눈의 시력을 거의 잃으셨다. 당뇨 합병증이라고 했다. 이미 할아버지는 너무 늙었다. 더 어릴 땐 할아버지 손을 잡고 시장에도 갔었던 것 같았는데, 손녀딸들의 부축을 받고 힘겹게 겨우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을 5바퀴 정도, 그러다가 2바퀴 정도, 그러다가 결국에는 아무 데도 나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당뇨란 병은 무서운 것이 심해지기만 할 뿐,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할아버지댁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매주 할아버지가 쇠약해져 가는 과정을,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서서히, 서서히.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내가 결혼할 때까지는 본인이 살아계실 것이라고. 그러면서도 매년 새해가 밝으면, 온 가족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기셨다. 올해는 내가 정말 갈 것 같은데, 그러면 이러이러하게 하거라, 라고. 못해도 족히 10년은 그 유언을 들으면서 나는, 여느 때처럼,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저 결혼하는 건 보고 가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라며 할아버지를 안아드리고, 볼에 뽀뽀를 했다.


늘 1인용 안락의자에 앉아서 보이지도 않는 TV를 틀어두고,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계신 할아버지와 중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토요일에 학교가 끝나면 곧장 할아버지댁으로 걸어간다. 도착하면 1시가 조금 넘는다. 할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는다. 꽃처럼 둘레에 둥근 곡선이 가득한 상에는 매번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나는 늘 할아버지와 밥을 먹으며 이 반찬이 맛이 어떻고, 이것 좀 드셔보시는 건 또 어떻고, 이런 얘기들을 나누었는데, 할아버지는 내 입맛이 어른스럽다며 늘 칭찬하셨다. 밥을 먹고 나면 '약한데 공부는 잘해서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 손녀는 할아버지랑 같이 낮잠을 잤다. 2~3시간쯤 낮잠을 자고(자는 건 늘 자신 있었다.) 일어나면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나 '동물의 왕국', '6시 내 고향'같은 TV 프로를 함께 청취했다. 할아버지는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갣 앉아서, 우리는 할아버지의 다리을 양쪽에서 주무르며. 그리고 또 저녁을 먹고, 밖이 어둑어둑해지면 일을 마친 아빠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거실에 나와, 본인이 거실 불을 잘 끄고 잘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다음 주에 보자는 인사를 하고는 거실을 몇 바퀴 더 걸으셨다.


내가 대학교에 간 이후로 할아버지의 당뇨는 크게 악화되었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집에서 계셨는데, 이후로는 잦은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었다. 매주 보던 할아버지를 몇 달 만에 뵙게 될 때는 눈물이 날 정도였다. 저번엔 걸으셨는데, 이번에는 걷지 못하셨다. 저번 수술에서는 발가락을 절제했고, 이번에는 발목을 절제했다고 했다. 나중에는 거의 병문안 수준으로 뵙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늘 병상에 계셨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계속 살고 싶어 하셨다. 정말로 나의 결혼식을 보고 싶어 하셨다.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수술을 몇 차례 더 진행하며, 침상에서의 삶이라도 더 영위하고 싶어 하셨다. 그나마 그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마지막까지 할아버지의 뜻대로 일련의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여전히 그러한 삶을 감당할만한 재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여 년이 훌쩍 넘는 긴 병상에서의 삶을, 나의 할아버지는 끝까지 존엄하게 살아내다 돌아가셨다.


나는 늘 그의 간절한 삶의 의욕이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궁금했다.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점점 쇠약해져 가 결국은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도 없어진 순간에도, 매일같이 나약해져만 가는 스스로를 알면서도 놓지 못할 만큼의 생의 매력은 무엇일까.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약해져만 가는 육체와 그럼에도 모두를 호령할 수 있는 권위와 재력을 갖고 계신, 너무 사랑하고 너무 슬픈 존재였다. '오래오래 사세요.'에서 '오래오래 사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게 정말 좋을까. 너무 자주 아파서, 별 다를 것도 없고 비슷비슷한 삶이라면 나 하나쯤이야 해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를 고민하던 나는, 쇠약해져만 갈 육체임에도 어떻게든 붙들고 하루라도 더 살고자 하는 그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반 일리치의 삶에 맞먹는 분량의 할아버지 얘기를 해대 버린 것 같다. 이반 일리치의 패착은 '죽음'을 남의 일로 여겼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난 늘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게 그와 나의 (거의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과 나의 삶은 거의 비슷하다. 아마 톨스토이가 내 삶을 적는다면, 별 다를 것도 없이 익숙하게 적어 내릴 것이다. 평범하고 평범해서, 내세울 것도 그렇다고 쫄 릴 것도 별로 없는 그런 인생. 이반 일리치가 커다란 육각형이라면, 나는 그의 1/5 크기의 육각형 정도는 될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고,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내가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다가올 늙어감과 쇠약함에 대해,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 조금 더 의연할 수 있다고 내가 장담했던가? 아닐걸.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혹은 더 호들갑스럽게 무언가를 부정하고, 억울해하고, 골몰하고, 회피할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누구보다 더 깊이 흔들릴 지언정, 지식적으로는, 나의 이성으로는 이것이 완전히 합리적인 일련의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같다고 다르다고. 인간의 인생은 거기서 거기다. 당신도 나도, 별 특별할 것도 없다. 하지만 늘 죽음을 생각해라. 과제 마감날이 되어서야 황급히 과제 제출 형식을 확인하는 헛똑똑이가 되지 말고, 학점이 개판일지언정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고 살아가라. 늘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고, 삶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 탐색하고, 의미와 가치를 묻고, 그럼에도 확신이 선다면 살아가라. 당신이 이반 일리치와 같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다면 말이다.


진짜 짧으니까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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