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학교 다녀요.

내가 작은 학교에 반해버린 이유

by 첫둘셋

내 첫 근무지는 서울의 모 초등학교였다. 총 학급수 29~30 학급, 학년별 4~5 학급을 왔다 갔다 하는 중규모 학교. 천지가 개벽하고 상전이 벽해하여 지금은 괜찮은 학군을 자랑하는 동네가 되었지만, 재개발 전의 그곳은 가르치기 꽤 까다로운 아이들이 반에 예닐곱 명은 분명히 존재하는, 신규 발령이 많이 나는 이유가 확실한 동네였다.


그때는 조금 애매했다. 시기적으로 내가 '낀대'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령 첫 해에는 아직 학생인권조례도 공포되지 않았고, 격주 토요일마다 근무하는 놀토-지금은 놀라운 토요일이라고 알고 있는-도 있었다. 현장체험학습, 운동회, 학예회가 성대하다 못해 교육과정을 쥐어짜 내면서까지 존재했었고, 온 동네의 청년교사들은 스카우트로, 해양소년단으로, 아람단으로, 이름만 바뀐 다양한 청소년 연맹으로 소중한 주말을 사용하던 때였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강한 교권, 가능한 체벌, 약한 민원 때문이었고, 지금보다 훨씬 열정적이고 주도적인 교사들이 활개를 칠 수 있었다.


나의 첫 학교는 나의 삶 그 자체였다. 담임을 맡은 첫 해에 해가 지기 전에 퇴근을 한 일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별다른 업무가 없었음에도-병아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겠나!-나에게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이 충분히 버거웠으므로 나는 스물일곱 명의 아이들의 하루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그들의 내일을 준비하는 데에 나의 하루를 온전히 바쳤다. 특히 우리 학년은 소위 말하는 해갈이-학교에는 '해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올해 4학년이 아주 나이스했다면, 다음 4학년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문율 같은 미신이다.-에 당첨되는 기쁨을 지닌 학년으로,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학급의 동학년 선생님들이 모두 특수부장님이었던, OO초 어벤저스로 활약이 가능한 멋진 학년이었다. (부디 행간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 주길 바란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학생교육에 매진했다. 특별히 안전교육을 위해서는 너도 나도 학급에 상관없이 복도에 나뒹구는 학생들을 불러 세워 지도할 수 있는 조약-어떤 교사의 경우 자기 학급 학생이 다른 반 담임선생님께 지적받거나 혼나는 것을 불쾌해하기도 한다.-을 체결했다. 수업 시간 중 복도에서 누군가의 샤우팅이 들리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내다보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각자의 수업을 진행하기로 약조했다. 우리 넷은 똘똘 뭉쳐 우리 학년의 정상화를 위해 애썼고, 사실 별 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저 무사히, 한 해를 보냈다는 것뿐. 그들을 5학년으로 올려 보내고 우리는 파티를 했었던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사실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만나서 파티를 한다. 그만큼 강렬했다.


첫 학교에 근무하는 5년 내내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하고 해결해 나가며 개인적으로나 교사로서 크나큰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만큼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도 많이 받았다. 문제의 크기와 종류가 다를지언정 결국은 그것이 나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학급'의 문제 혹은 우리 '학년'만의 문제로 치부될 때가 대다수였다. 어떤 것도 정량화할 수 없는 업무의 특성상 목소리 높여 자신의 어려움을 어필하는 교사 혹은 학년이 조금이라도 덜 힘든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일이 계속되었다. 누군가와 싸워 차지할 힘이 없거나 아직 뭔가를 잘 모르는 햇병아리들은 이 볼성사나운 의자 뺏기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불 같았던 첫 학교에서의 기억이 내 마음에 진한 화상을 남긴 채로 나는 아이들을 낳으며 육아 휴직에 들어갔고, 2년 반 뒤 시도 간 파견을 써서 지방의 11 학급 학교로 발령이 난다.(이 당시에는 별 뜻이 없이 애들이 어리고, 친정 엄마가 거기에 있었기에 파견을 마음먹었었다.) 중고 신입이 더 막막한 법이라서, 나이만 먹고 인생만 복잡해진 채 별다른 전문성이 없는 채로 더 이상 젊지도, 열정적이지도 않는 나 자신을 열심히 추슬러가며 다시 학교로 출근을 했더랬다. 선생님들 다 합쳐도 15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 한 반에 15명, 한 학년에 30명이 될락 말락 한 작은 학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발발 떨고 있는 '나'를 알았다. 모든 학생이 모든 선생님을 알고, 모든 선생님이 모든 학생을 알았다. 익명성이 없어진 작은 공동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것이 가능했다. 크게 앓는 소리 하지 않아도 나의 어려움을 알았고, 큰 문제가 생기면 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지만 늘 외로웠던 대도시의 생활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그마한 동네의 작은 학교의 사람들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점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