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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Nov 01. 2020

성장기와 국제교류

넓어진 시야

앞서 말했듯,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에 놀랍도록 적은 부분만이 나의 자발적인 노력과 실력의 산물이다. 물려받은 성향 등의 요소는 차치하고, 가정에서 제공해준 자원이 대부분의 영향을 끼쳤다. 


독일에서 이중 언어 인간으로서 치열한 청소년기를 보내던 중인 나는 독일이 답답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부유한 주민들로 유명한 동네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다니던 학교도 현지 독일인의 비중이 매우 높았으며 이민자 내지 이주민 자녀들의 비율은 매우 낮았다. 게다가 현지 독일인들의 사회 배경이나 행동 양식이 서로 매우 비슷했다. 인터넷과 책, 이중 언어 배경으로 다차원적인 시야에 길러진 나는 그런 정서적 집단 순수성이 틀에 박힌 것처럼 느껴졌다. 쉽게 말해 중2병이던 나는 자꾸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경향으로 사춘기를 표출했다.


 우선적으로, 외각에 살던 나는 자꾸 내 동네를 내팽개쳐 두고 그렇게도 근교 시내로 쏘다녔다. 독일의 주요 대도시인 근교의 시내는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특히 내가 찾아다니는 시내의 소우주들은 내가 거주하는 안전하고 고리타분한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막 학교 내 트러블을 겪었기에 내 몸뚱이에 갑옷 치듯이 환생하려 했던 사춘기 여자 아이던 나는 일부러 강해 보이고 사교력 높아 보이는 친구들에게 자석처럼 이끌려 내 여가시간을 의탁했고, 그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노는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한국의 맥락보다는 의미가 다른 것이, 그들이 다니는 학교와 학우들의 세상은 하층민에 가까워서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적이었다. 누가 누구를 괴롭히고 따돌린다기보다는 무협 학교 같은 분위기에서 서로를 향한 긴장과 규율을 자체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긴장감은 꽉 차게 따른 물컵과도 같아서 살짝만 건드려도 넘쳐흘렀고, 나는 그때 여자아이들이 패싸움을 하면 어떤 상처가 남는지도 봤다. 물론 나는 여기서도 멀찍이 바라보는 존재라서 사건이 터진 후에 그 흔적을 보기만 했다. 내가 어울릴 수도 없지만, 열심히 어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해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제로 그 생태계에서 살 필요 없이 단지 관광객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크나큰 특권을 뜻했다는 사실을 그때도 어렴풋이 인지했던 것 같다. 꽤나 차가운 감성으로 그들의 그런 면들을 바라봤으니까.


이런 식으로 거리의 법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살던 나에게 내 본향인 생태계, 그러니까 중산층에서 상류층을 아우르는 내 동네는 뭔가 연극처럼 느껴졌다. 경제관념에 매우 둔했던 그때의 나는 내 눈 앞에서 충돌하는 사회 계급 간의 미묘한 긴장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단지 내가 더 단단해지기에는 이곳의 세상이 너무 좁고 유약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젊은 어른이 되어서 여기가 가장 단단한 무기의 철옹성 같은 집합소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어린 이중 언어 인간에게는 돈보다 문화가 더 치열했다. 삶과 일상의 조건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 반면에 이중 언어 인간을 해하려는 소시민적 문화가 나에게는 실질적 위협이었다. 그것이 추상적인 위협이 절대 아니라, 감수성이 말랑말랑하고 기싸움보다 지식을 선호하며, 한국적 특성이 천편일률적 무리 중에서 모나게 떠서 공격의 대상이 되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물리적 위협으로도 변질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후였다. 물리적 위협이 굳이 크지 않아도 어린 나에게는 정서적 여파가 크다는 사실도 충분히 감지한 후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내가 나를 보호해야 함을 알았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부모님마저, 이런 이중 언어 인간의 문화 전쟁에서는 나를 도와주실 방도가 없었다. 내 안의 한국인을 보호하는 임무에는 한국인이 아닌 독일인 내지 진화한 이중 인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런 과정을 거치며 지금 이 곳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 나는 도피 반, 도전 반의 심정으로 미국 교환 프로그램을 떠나게 해달라고 부모님에게 간곡히 간청하였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이중 언어 인간은 미국에 도착해서 혼란이 오히려 가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1년이 지나고 돌아온 후에는 시야가 더 넓어져 있었고 조금 더 자신감은 올라가 있었다. 그만큼의 스트레스의 대가를 치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미국 체류 기간을 포함해서, 내 청소년 기간 동안에는 매 해 여름 한국을 방문하는 정기적 리듬이 꾸준히 이어졌다. 한국을 방문하면 한국 아이들과 어른뿐 아니라 독일을 제외한 해외 동포들을 수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꾸준한 국제 교류는 내 시야를 방대하게 넓히기도 했지만 이중 언어 인간의 내적 혼란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이중 언어 인간이 필수로 거쳐가야 하는 변곡의 향연은 아직 반도 지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청소년의 시야는 얼마든지 넓힐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해답이 되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해답을 찾는 옵션의 폭이 넓어진다는 표현이 옳다. 그렇다고 해서 해답을 찾기에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중 언어 인간이 대면하는 구체적 도전의 변함없는 연장선의 변주곡일 뿐이다. 시야를 넓혀도, 여러 다른 폭포 아래에서 수련해도, 결국 답은 내 안에서 느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앞에 최신형 첨단 정밀 기계가 놓여있다 한들, 어떤 때는 돌멩이 하나 목판 하나보다 못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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