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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May 16. 2024

군대와 <삼국지>

내가 [삼국지]를 다시 읽게 된 이유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러브레터>, 책 <햄릿>,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실제로 보고, 읽은 적이 있나?


너무 유명한 고전이라 어렸을 때부터 접했던 작품들은 어련히 과거의 내가 봤을 거라 짐작하고 혹은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필독서라고 불리는 책은 더욱 그렇다.


그에 비해 <삼국지>는 양반인 편이다.

확실히 난 <삼국지>를 봤다. 읽은 게 아니라, 봤다고 말하는 이유는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60권짜리 만화책으로 <삼국지>를 봤기 때문이다.


그림체만으로도 캐릭터가 파악될 정도로 직관적인 만화였다. 인물은 쉽게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고, 나는 오빠를 따라 이 만화를 2~3번은 읽었다.


이렇게 오래전에 만화로 본 <삼국지> 얘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 내가 <삼국지>를 소설로, 제대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험사에 소속돼 있는 임직원들의 성비는 조금 독특하다. 실질적으로 영업하는 대다수의 설계사들은 여성이며,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남성이다.


물론 내가 입사해서 들어간 팀은 경력직이 타 팀보다는 많아서 여성 비율이 적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남성들의 주를 이루는 구조다.


수신자 제위, 보직, 실무배치, 깃발론 등.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성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알게 모르게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맘 편히 다니려면 그러든지 말든지 지나치는 게 좋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서는 번거롭고 귀찮은 일에는 여자가 예외 되니 몸도 편할 수 있다. 그런데 난 예외든, 소외든, 제외든 뭐가 됐든 배제되는 상황이 싫었다.


여자를 위한다는 그들의 배려가, 어느 순간 배제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배려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합쇼체'를 주로 사용하는 이곳에서 나는 너무 딱딱한 사내 문화가 어색해 웃음을 지은 적도 여러 번이다. 모두가 과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나는 못내 참기 힘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실제로 나와 동갑내기인 한 과장이 나에게 업무 요청을 했을 때 일이다.


"X대리님,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 뭐지, 갑자기?

"네, 과장님두요?"

"덕분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많이 바쁘시겠지만"

- 일 없는 거 모르나?

(이어)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이렇게 잡은 미팅 자리에서 그는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업무에 대해 협조 요청을 했고 나는 순수히 응했다.

조금 친분이 생기고, 그와 내가 동갑이며 생각보다 서글서글한 성격임을 확인하고 평소 가졌던 의문을 던졌다.


"그냥 용건부터 말하면 안 되나요?"

"아. 뭐 그래도 되는데, 너무 삭막하잖아요. 무례해 보이기도 하고.."


소위 말해 '쿠션어'가 일상인 곳. 더 내밀한 얘기를 들어보니, 이들이 현장에서 주로 대하는 사람들은 중년이상의 여성들이고, 본사에서는 나이는 물론 직급이 높은 남성들이기에 예의를 과하리만큼 차리는 것이 무난한 선택이기도 한 셈이었다.


그렇게 친해진 그 과장은 이후부터 팀과 회사가 돌아가는 모습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알려주었다.


"생각해 보세요, S과장이 팀장님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일 것 같아요?"

"이 사람은 회사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을 다른 팀으로 보냈다? 그건.."


사내정치와 담을 쌓고 지냈던 내게 그의 눈은 렌즈와 같았다. 그 렌즈가 예민하게 레이더를 돌리는 만큼 많이 보았다. 렌즈를 통해 보는 회사는 불편한 진실에 가까웠다.


그런 나의 렌즈가 지점으로 발령이 났다. 주말부부를 하느라 몇 년 간 고생했으니, 그에겐 무척 좋은 일이었지만 나는 좀 허전했다. 렌즈를 너무 의지했던 것일까? 나는 흐리멍덩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가 말했던 사내정치에 뛰어들 순 없지만 알고는 싶었다.


잠잠코 이 남자들이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보니 그 중심엔 군대와 <삼국지>가 있었다.


특히 보험사는 장교 출신의 직원들이 많다. 단순히 군필자가 아니라 장교 출신을 선호하는 이유.

그 안에는 꽤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입사해서 신입사원이 가장 먼저 하는 게 현장 영업을 뛰는 것이다. 직접 영업을 하는 게 아니라, 보험설계사들이 소속 돼 있는 지점의 '장'이 돼 그들에게 영업을 독려하고, 때마다 새로 나오는 보험 상품을 설명하는 등의 일을 주로 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한 조직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조직을 다룬 경험이 있는 장교들이 유리한 것이다.

나는 직장 생활 10년이 넘어서야 사람을 다루는 방법, 즉 용인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는데,

이 회사는 입사 초기부터 신입사원들에게 이 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이제 와서 군대를 갈 수 없으니, 그와 상응하는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삼국지>를 읽기로 결심했다.  


팀에서 <삼국지> 마니아로 알려진 한 대리에게, 그 책의 매력을 물었다.


"과장님, 그 안에 조직생활의 노하우가 다 들어 있어요"


도원결의를 했던 3인 외에, 조조, 조자룡, 제갈량 외에 아는 인물의 이름도 가물가물한 나에 비해, 이 남자들은 등장인물들을 술술 꿰고 있었다.



때마침 내가 열중해서 듣고 있던 한 심리상담유튜브도 <삼국지>를 인생 책으로 꼽았다. 안 읽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1권당 500페이지가 넘는 <삼국지> 6권을 구매해 읽기 시작했다.

여자인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회사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졌다.


"와, <삼국지> 읽는 여성분은 처음이에요"


그럴 때마다 나는 빙긋 웃긴 했지만 '너네가 감명 깊게 봤다는 그거, 나도 알거든?', '그렇게 좋다면, 나라고 놓칠 수 없지' 등의 마음이 들었다.

<삼국지>가 꼭 남자들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기본적으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고려할 때 어쩔 수 없이 남성우월주의, 남성중심적인 사고를 감안하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면서 하나 더 느끼는 건, 정말 야만적이고 잔인했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6권 중 두 달 만에 2권을 읽고, 앞으로 4권의 책이 남았다. 그 끝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군 조직을 경험한 이 남자들 사이에서

<삼국지>를 얘기할 때 말 한마디 거들 건더기는 마련하게 됐다.  그렇게 보험사에서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무기 하나가 장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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