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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Jun 05. 2023

나는 캘거리 택시운전사

다정도 병이라더니 나에게는 호기심도 병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궁금한 게 하나 생기면 그냥 쉽게 넘어가지를 못하고 그것이 뭔지, 왜 그런지, 그 의문을 꼭 풀어야만 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그것도 어른들에게 물어보거나 책에서 찾아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꼭 내가 직접 부딪혀보고 뜯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한 번은 양 옆으로 무논이 어어져 있는 흔한 시골길을 동무들이랑 걸어가다가 메뚜기가 포로록 포로록 날아다니는 걸 보았다. 눈에 뜨이는 건 뭐든지 장난과 말썽거리로 만들고야 마는 그 시절 그 또래의 남자애들답게 어떤 놈이 메뚜기를 잡아서 구워 먹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들은 신이 나서 논두렁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메뚜기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메뚜기는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두 손바닥을 모아서 펴고 바닥에 앉아 있는 놈을 덮치면 메뚜기는 잽싸게 옆으로 폴짝 뛰어서 공중에 떠오르고 곧 푸드덕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몇 번 실패를 한 후에 우리는 요령을 발견했다. 그냥 가까이에 있는 놈을 무턱대고 잡을 것이 아니라 한 놈을 끝까지 쫓아가는 것이었다. 메뚜기가 빠르긴 해도 몇 번 뛰고 나면 힘이 빠져서 나중에는 손으로 그냥 집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 엄청난 발견에 기가 살아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메뚜기 사냥에 빠져있는데 나는 갑자기 이 놈들이 왜 그렇게 멀리 펄쩍 뛸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린놈이 무슨 청승으로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메뚜기 해부를 하기 시작했다. 과연 메뚜기의 뒷다리는 몸집에 비해 굵고 튼튼했으며 안에는 질긴 힘줄이 들어있었다. 몸통에 이어져있는 한쪽 끝을 당겨보니 다리의 아랫부분이 디딜방아 공이처럼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메뚜기 다리가 움직이는 원리를 좀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움직이는 모양이 장난감처럼 재미도 있었다.

내친김에 논에 들어가서 개구리까지 잡아서 뒷다리를 해부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개구리의 길고 큰 뒷다리 구조가 메뚜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해서 기뻤지만 책에서 읽은 무슨 용수철 원리까지는 알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기억에 남는 나의 다음 도전은 그때만 해도 꽤 비싸고 귀하던 시계와 라디오였다.

째깍째깍 소리를 내면서 초침이 돌아가고 시간을 맞추어 놓으면 종이 울리는 동그란 탁상용 자명종 시계와 다이얼을 돌리면 이런저런 방송이 나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내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나를 안달 나게 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원리를 알 수가 없었기에 뜯어서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고장이라도 내면 부모님께 혼이 날까 봐 참고 있었는데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 어쩐 일로 부모님이 모두 어디 가시고 형들도 다 놀러 나가서 적막한 집에서 나는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시계와 라디오 사냥에 나섰다.

아버지가 쓰는 작은 드라이버가 내 사냥 도구였다. 분해는 비교적 쉬웠다. 나사를 몇 개 풀고 겉의 케이스를 벗기자 톱니바퀴와 용수철이 서로 맞물려서 딸깍딸깍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수많은 부품들이 동시에 같은 리듬으로 착착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모든 부품들을 하나하나 분해하기 시작했다. 시계의 움직임이 멈추고 방바닥에 주욱 놓여있는 부품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첨단기계를 정복한 기분에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조립이 문제였다. 내 생각에는 분해한 순서의 역으로 다시 끼워 맞추면 될 줄 알았는데 조립이 끝나고 남은 부품이 없어졌는데도 시계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시침을 움직이는 조정기를 손으로 돌려보아도 어디선가 톱니가 어긋나게 물렸는지 시계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하지만 병적인 호기심의 유혹과 실패를 만회하여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나의 무모한 오기는 아버지에게 혼이 날 두려움을 잊게 만들었다.

또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더구나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내장을 다 들어내도 이상한 좁쌀 같은 부품만 잔뜩 전선으로 얼기설기 엮여 있을 뿐 어떻게 소리가 나오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고 드라이버 만으로는 떨어진 부품들을 대충 연결할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 집 자명종 시계와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한날한시에 갑자기 이유도 없이 고장이 나고 말았는데 그것은 내가 둘 다 겉 껍데기만 멀쩡하게 끼워 맞추어놓고 시치미룰 뚝 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내 이 호기심의 씨앗이 어디에서 뿌려졌으랴? 저녁때 집에 오신 아버지는 고장 난 시계와 라디오를 버리거나 수리점에 가져가지 않고 직접 고치겠다고 뚜껑을 열었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바로 알아차리셨다. 아, 차라리 미리 자백이라도 했더라면 조금 덜 혼이 났으려나?

그날 분명히 된통 혼쭐이 났을 텐데도 나의 이 장르를 가리지 않는 좌충우돌 호기심 시리즈는 끝이 나지 않았다.

아마 이성에 눈을 좀 뜰 때였는지 언젠가는 뜬금없이 여자들이 화장실에 가면 치마를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아래를 걷어올리고 볼 일을 볼까, 아니면 남자들처럼 허리춤을 풀어내리고 볼 일을 볼까? 그 어느 쪽이든 치마의 구조상 바닥에 닿거나 상당히 불편할 것 같았다.

누나에게 물어봤다가 억수로 혼났다.

다시는 그런 변태스러운 의문은 풀어볼 시도를 안 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여자들이 아래위가 붙어있는 작업복인 오버올 옷을 입고 어떻게 볼 일을 보는지 그 답을 모른다.

그 후에도 나는 개인용 PC가 보급될 때는 기성품이 아니라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부품을 사다가 직접 조립을 해서 써야 직성이 풀렸고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전화선에 모뎀을 달아서 인터넷을 개통하여 처음 NASA site에 접속한 날의 그 감격은 마치 내가 인류최초로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토롱이라도 된 것처럼 뿌듯했다.

또 교사가 되어 첫 방학 때는 책과 TV로만 알고 상상하던 세상문화와 역사유산이 실제로 어떤지 직접 체험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보다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없는 돈을 박박 긁어모아 유럽 배낭여행을 나섰다.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역 대합실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는 거지 같은 생고생을 했어도 그때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태리에서 체득한 충격적일 만큼 감동적인 문화적 경험은 내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고 내 생각의 지평을 오대양으로 넓혀준 소중한 것이어서 지금도 전혀 후회는 없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삼성에서 외국은행으로 또 교직으로... 분야가 아주 다른 직업으로 이직을 한 것도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이 한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 호기심이 드디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된 것은 운수업으로 성공한 형이 캐나다로 진출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그 유혹은 내 예민한 호기심 폭탄에 불을 댕기는 뇌관이 되었고 도전정신이라는 화약으로 충만한 내 몸을 안달 나게 만들어 결국 사람들의 미쳤다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교직을 버리고 겁 없이 지구 반대편 캐나다 땅에, 그것도 대형 트럭 운전사로 발을 딛게 만들었다.

무모하고 미친 짓이었다.

운전을 배우고 시험을 치고 현지인들도 어렵다고 혀를 내두르는 1종 면허를 따는 고충은 차치하고서라도, 겨울이면 영하 40-50도의 눈보라가 몰아쳐서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이고 어디까지가 길이고 도랑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그저 천지가 하얀 눈으로 뒤 덮인 그 끝없는 벌판에 바퀴가 22개 달린, 20미터 길이에, 65톤 무게인 그야말로 한국에서는 보도 듣지도 못한 산더미 같이 큰 트럭에 각 200kg짜리 돼지 240마리를 싣고 전화도 안 터지는 오지에 있는 시골 농장 길과 시속 100km를 달리는 고속도로 왕복 600km를 12시간에 주파하고 상하차까지 마치라는 운송장을 하나 달랑 들고 난생처음으로 혼자서 눈 덮인 도로 위에 나섰을 때의 그 막막함이란 그야말로 영화 Martian에서 화성에 홀로 버려진 Matt Damon이 된  심정이었다. 가끔 초보 트럭커가 그렇게 하듯이 나도 그 자리에 트럭을 버려두고 당장 한국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포기를 모르는 똥자존심과 나약하고 무책임한 한국인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겠다는 막연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나는 새벽 2시경에 간신히 하차까지 마치고 마침내 회사로 귀환했다. 비록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개선장군처럼 뿌듯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게 더 큰 고난이 회사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신나게 퇴근을 하려고 사무실에 송장을 내밀었더니 관리 직원이 지나가는 말처럼 트럭 청소는 했느냐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운전석 청소를 하라는 말인가 짐작하고 '그까짓 거' 하면서 돌아서는 데 아뿔싸! 친절하신 직원분이 고압분무기 사용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인즉은 짐칸도 나보고 하라는 뜻?...

3단으로 된 트럭 짐칸에는 돼지의 오물과 짚과 운송 도중 사망한 시체까지 범벅이 되어 쌓여있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강추위에 몽땅 얼어붙어서 전부 돌덩이처럼 굳어있었다. 요령이 있었다면 그리고 청소까지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하차를 하고 나서 미처 얼기 전에 바로 청소를 했어야 그나마 일이 좀 수월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청소용 오버올로 갈아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3개 층 바닥을 기어 다니며 청소를 하는데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고 무서운(캄캄한 밤에 돼지 시체를 혼자서 쇠사슬로 묶어서 끌어당기는) 일이 이 일인 것 같았다. 정말 내가 왜 여기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내 운명과 호기심을 저주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슨 시커먼 물체가 짐칸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청소용 삽을 움켜쥐고 돌아서니 회사의 다른 기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좀 도와줄까?”라고 하더니 바로 삽을 들고 2시간 넘게 나를 도와주고 새벽 4시가 넘어서 일을 마치고 내 어깨를 한 번 툭툭 치면서 “내일 봐”라고 하고선 올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날이후로 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천사는 돼지 똥 묻은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믿게 되었다. 그도 분명히 힘들고 지쳐서 얼른 따뜻한 집에 가서 씻고 쉬고 싶었을 텐데 이국에서 온 내 곤경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날 캐나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산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이렇게 잘 살게 되고 경제적 문화적 선진국이 된 것이 우연히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더불어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보았기 때문에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환하게 즐거웠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밝고 착하게 남들을 도와주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이 미친놈은 거기서 멈추기는커녕 호기심을 채울 명분도 생기고 숭고한 사명감으로까지 재무장을 했으니 또 WWOOF라는 시골 농장 체험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등록을 했다.

아 그러나 이 일도 겉으로 보기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 예쁘고 순한 양들도 똥은 한정 없이 퍼질러 싸놓고 매애애 울면서 주말마다 내 노동을 기다리고 있었고 벽난로의 장작은 평화로운 불멍이 아니라 허리와 팔과 어깨를 쑤시게 하는 끝없는 장작패기 일감이었다. 아이고 캐나다에는 어떻게 숲 속에만 들어가면 그 귀한 장작용 참나무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는지…. 씨!

더욱이 여자 농장주는 오랜만에 남자가 왔다고 좋아하면서 숙원사업이었던 장작보관용 창고까지 지어달라고 했다.

그래도 내가 설계하고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고 지붕을 이어서 며칠 만에 창고를 완공하여 장작을 그득 쌓아놓고 보니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주말마다 농장에 가서 일을 마친 후 화톳불에 마시멜로우를 구워 먹고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참 아름다웠고 자작나무 숲 사이에 비치는 달빛과 통나무 캐빈의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다음엔 도전은 일반 농장체험 이었다.

처음에 갔던 농장은 규모는 컸지만 수익을 내기보다는 취미 겸 전원생활이 주목적이어서 이번에는 제대로 된 농장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마침 감자가 수확기라서 감자농장에 일용직으로 취업했다. 내가 간 농장에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들판에 거의 지평선 끝까지 감자가 심겨 있었다. 땅을 파서 감자를 캐내는 수확은 엄청나게 큰 트랙터가 자동으로 하고 그걸 트럭에 싣고 와서 창고 앞마당에 부려놓으면 다시 컨베이어 벨트에 실어서 창고에 저장하는 데 그 컨베이어 벨트 좌우에 나란히 서서 감자 속에 섞여있는 흙덩이를 골라내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었다.

주인은 1850년경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때 캐나다로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이었고 일용직은 주로 백인 마을 아줌마나 나 같은 동양계 이민 1세였다. 주인은 이것저것 경비 떼면 남는 것도 없다고 엄살을 떨었지만 내가 보기엔 꽤 부자였다. 그의 4대조 할아버지가 이민을 올 때만 해도 황무지를 2년만 개간하고 경작하면 정부에서 땅을 1 에이커에 2달러라나 하는 돈을 받고 거의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본인들은 추운 데서 움막을 짓고 살면서 기계도 없이 말로 밭을 갈면서 고생을 했겠지만 후손들은 덕분에 여유롭게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추 당초보다도 뱁다는 시집살이보다도 힘들다는 전방 군생활을 포함한 내 일생의 고생 10년을 압축파일로 저장한 듯한 모진 1년을 보내며 트럭 사업을 할 경험과 노하우를 쌓고 이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더니, 이런 C Bull! 형이 그만 사업을 안 하겠단다! 생각보다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기가 힘들 것 같고 한국의 사업도 예상외로 바쁘게 잘 돌아간다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나만 낙동강, 아니 캐나다 구스 오리알 신세가 됐다.


호기 있게 이미 명퇴를 하고 수당까지 타먹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면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캐나다에서 한 번 교직으로 복귀해 보려고 캐나다 교원 자격 전환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이 망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제도적으로는 교사 의사 간호사 엔지니어 조종사 등 해외의 전문직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면 캐나다 자격증으로 바꿔 탈 수 있었고, 교수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동료들이 주워온 정보에 의하면 의사나 교사는 자격증을 따도 취업이 쉽지 않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누가 영어가 서투른 의사에게 자기의 소중한 몸을 맡기겠으며, 어느 학부모가 외국 엑센트가 있는 교사에게 자기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겠는가?

안 되는 것은 매달릴수록 손해라는 것을 깨닫고 즉시 포기하고 직접 수업을 하지 않는 생활지도 담당을 지원했다. 한국의 교사들이 들으면 부럽겠지만 여기 교사들은 잡무가 하나도 없다. 진짜 종소리 나면 교실에 들어가서 딱 수업만 하고 종이 치자 마자 교실을 나오면 끝이다. 물론 수업자료 준비나 과제 점검은 해야 하지만 나머지 생활지도나 학사관리는 모두 교장선생님이나 나 같은 보조가 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내 평생 최고의 호기심 끝판왕을 만났다.

2학년인 Jory는 나 같이 순진한 호기심 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호기심을 쉼 없이 토해냈다. 하루는 운동장에 차바퀴 자국이 있는 걸 발견하고선 교장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무슨 차가 왜 운동장에 들어왔는지를 물어보았고 나를 보고선 내가 웃을 때 입 안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는데 그게 무엇이냐? 왜 그게 거기에 있느냐고 물으면서 내가 입만 벌리면 올려다보았고 틈만 나면 내 입 안으로 기어들어올 기세였다. 귀찮아진 나는 죄 없는 내 금니를 감추려고 크게 웃지도 못했고 교장선생님과 한편을 먹고 멀리서 Jory가 나타나면 일찌감치 도망을 갔다. 그러면 Jory는 또 그걸 눈치채고 쫓아와서 결국 한동안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저 놈도 나처럼 인생이 순탄하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묘한 동지의식을 느끼며 숨바꼭질을 멈추었고 그 후 다른 어느 학생들보다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이건 한 학기를 마치고 내가 학교를 떠날 때 아이들이 만들어 준 작별 카드이다. 맨 왼쪽 위가 Jory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이름을 미처 다 외우지 못한 나를 도와서 매일 출석 체크를 해준 착한 Mary도 잊을 수가 없다.

이처럼 초등학교 생활지도가 즐겁고 보람도 있었지만 part time 임시직이라 성인 남자가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기에 내가 class 1 운전 자격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교감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다음 학기부터는 school bus 운전을 하게 되었다.

 등하교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노는 것이 재미있었던 나는 school bus 운전이 일이라기보다는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내 차가 아이들을 태우려고 도로 옆에 서면 STOP 사인이 자동으로 펼쳐지면서 주변의 다른 차들이 일제히 멈추어 서는 것도 신기했다.

그러나 어디에나 말썽꾼은 있는 법, 한국에서는 고등학생 지도가 좀 힘든 편인데 캐나다에서는 중학생이 가장 골치가 아프다. 초등학생들은 대부분 말을 잘 듣고 고등학생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규정을 지키니까 별 문제가 없는데 중학생들은 알만큼 아는 놈들이 규정을 살짝살짝 어기는 일이 꽤 자주 일어난다. 나도 인도계 아이 하나가 버스 안에서 음식물을 다른 아이들에게 자꾸 던져서 몇 번 주의를 주었는데 이 놈이 시정을 하기는커녕 은근히 내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몰래 그 짓을 계속했고 급기야 내가 차를 멈추고 소리를 질러 제지를 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그놈도 교장실에 불려 갔지만 나도 회사에 사유서를 제출해야 했다.

정나미가 떨어진 나는 그다음 날부터 일 나가는 것이 좀 시큰둥해졌는데 역시 호기심 신은 나를 잊거나 버려두지 않으셨다.

며칠 후 기다렸다는 듯이 동료 하나가 내게 관광버스 운전을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나는 class 1 자격증이 있으니까 우대를 받을 것이며 속 썩이는 아이들도 없고 수입도 좋고 여름에만 바쁘고 차도 고급이고 팁도 받고 blah blah...

그래서 또...

관광버스 운전을 계기로 등산 가이드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너무 많아서 다른 글에서 따로 소개하겠다.


그런데 운명은 나를 여기서도 안주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누가 생각했으랴? 코로나가 터지고 그 한파가 관광업에 치명타를 날릴 줄이야! 그래서 나는 한동안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했고 덕분에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사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동네 배드민턴장이나 조기 축구회에서 신나게 노는 개인택시 기사들을 보면서 택시 운전 생활도 재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여기서 허용된 UBER 기사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교육받고 시험 보고 자격증 따고 차량 영업용 안전 검사받고

영업용 차량 번호판 받고 Uber 표시 부착하고

Uber app 깔고 드디어 짜잔 운행이다

준비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근무 시간이 자유롭고 손님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영어와 문화도 배우다보니 택시 일을 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그러나 곧 코로나가 풀리고 관광업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여 회사가 나를 부르니, 나의 짧은 UBER 체험도 금방 끝이 났다.


아,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호기심이 불을 당기고 운명의 우연이 부채질하며 무모한 오기의 수레바퀴로 쉼 없이 달려가는 나의 이 방랑은 지구 반대편에 와서도 멈추지 않으니 … 언제쯤이나 평온한 휴식의 날이 찾아오려는지…

그래도 나는 오늘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 라고 궁금해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나의 하루를 시작하고 있으니, 내 이 빌어먹을 호기심 병은 나도 참 못 말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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