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수 Jun 05. 2023

No, thank you

다정, 호기심과 더불어 내 고질병 시리즈의 3탄은 이른바 '거절을 하지 못하는 병', 그 이름도 듣기 거북한 일명 ‘거못병’이다.

이 병의 증상은 누군가로부터 부탁을 받으면 거절은 못하면서 반대로 막상 자신에게 아쉬운 일이 있을 때에는 상대방에게 부탁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탁을 받을 때는 '이 사람이 얼마나 아쉬우면 이런 부탁을 할까, 내가 힘들어도 들어주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내가 부탁을 할 상황이 되면 '내가 이런 부탁을 하면 이 분이 얼마나 힘들 것이며, 거절을 하기엔 또 얼마나 난처할까? 혹시 나처럼 사정이 안되는데도 억지로 승낙을 하면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라는 되지는 않는 헛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병을 앓는 사람들이 또 있다는 말은 들었기에 ‘그래 같은 거못병 환자끼리 가까이에서 같이 살면 서로 부탁도 거절도 쉽게 하지 않아도 되니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직 나만큼 심각한 증세를 가진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런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의 어머니는 밤늦게 누가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무조건 전화를 끊어버린다. 하지만 나는 이런 어머니의 철통 같은 수비망을 뚫고 새벽 3시에 갑자기 열이 오른 동료 선생님 아이를 내 차에 태우고 파주에서 서울역 아동병원까지 질주를 했고

밤 11시에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는 근심스러운 사모님의 전화를 받고 밤새 인근 경찰서를 수소문 한 끝에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서 응급실에 누워있는 동료 선생님을 찾아냈으며

이유 없이 출근을 안 한 선생님의 자취방에 가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의식을 잃은 분을 차에 싣고 고압산소치료기가 있는 병원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또한 수업시간에 갑자기 쓰러진 체중 90Kg의 역사 선생님을 둘러업고 4층 계단을 급하게 내려오다가 고관절이 빠지는 줄 알았고

대학교 때는 등록금이 없다는 후배 등록금을 대신 내주느라 정작 나는 한 학기 동안 라면만 먹으며 죽어라 알바를 해야 했다.

군대에서는 취업을 하겠다고 도망간 동기들을 대신해서 제대하는 날 새벽까지 철책 순찰을 돌고 전역신고를 해야 했으며

사업을 하는 친구가 부도를 막아야 한다면서 돈을 잠시만 빌려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거금 6천만 원을 떼이고 막상 내가 어려울 때는 한 푼도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큰 형에게도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주기만 했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직장생활 30년동안 동료들 애경사 부조는 꼬박꼬박하고서도 정작 우리 부모님 상에는 혹시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울까봐 부고도 못했으며

환경운동연합이 군사격장으로 훼손되는 인제 원시림 보호 모금을 한다기에 5백만원을 보냈더니 그 사업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그냥 그 단체 운영기금으로 쓰고 말았다고 하고 북한 어린이 분유 사주기 성금을 매달 꼬박꼬박 보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임 모씨가 그걸 어떻게 써버렸는지 뻔할 뻔짜가 되어버렸다.

일직과 숙직은 바꿔달라는 대로 바꾸어주다 보니 연휴 중간날은 반드시 내 근무날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절 때 내가 근무가 잡히면 다른 선생님들이 자진해서 바꾸어주어서 나는 이상 없이 고향 집에 갈 수 있었는데 한 번은 내가 마눌님에게 자랑스럽게 "거 봐! 사람들이 다 나를 이용하는 건 아니야! 그동안 내가 도와주었으니까 명절엔 다른 선생님들이 이렇게 친절하게 나를 도와주잖아!"라고 했더니 우리 마눌님이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도 이상해서 나중에 학교에 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친한 여선생님이 "그건 명절에 시집에 안 갈 핑계를 만들려고 일부러 근무를 서는 거지 이 선생님을 위해서 바꾸어 준 게 아니에요!"라고 이 우매한 중생을 깨우쳐주었다.

아, 우리 마눌님이 나를 얼마나 가련하게 보았을까?

이 바보 멍충이!

그래도 나는 그 '거못병‘을 고치지 못하고 3학년 담임과 교무부장은 도맡아서 고생은 하면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근무 평정 점수는 양보하는 바람에 매년 교감 승진의 기회를 놓치고 만년 평교사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은 안했지만 나는 개에게도 못 이긴다. 우리 개가 이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 개가 해달라는 데로 다 해주고 가자는 데로 다 간다.

하지만 나는 캐나다에 오면 그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Yes와 No를 분명히 해야 하니까!

여기서는 싫으면 싫다고 하고 좋으면 좋다고 해야지 한국처럼 싫은데도 체면상 Yes라고 할 필요가 없고 그러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거라고 오해를 하기 때문에 여기 문화에 익숙해지면 나의 고질병이 고쳐질 것이라고 잔뜩 기대했다.

그러나 나의 이 최근 근무표를 보라

쉬는 날이라고는 하루도 없다. 코로나가 끝나고 여름이 되자 갑자기 관광객은 몰려오는데 코로나때 떠났던 다른 직원들이 미처 복귀를 하지 않아서 일손이 딸리자 그 사정을 '너무 잘 아는' 나는 또 No, Thank you를 못하고 이렇게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모두 내 탓인걸 어떻게 할 것인가?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연습을 해야지!

No, Thank you

No, Thank you

No, Thank you...


“예? 캐나다 문화에 대해서 궁금하시다구요?

내년에 Vancouver로 놀러 오신다구요?

물론이지요! 오세요.

아니에요. 한가해요. 저도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지요.

부담 가지시지 말고 부탁하세요.

그럼요. 우리 집에 빈 방도 있어요!“


‘마눌님 미리 의논 안 해서 죄송합니다!’


결론: ‘거못병’은 불치병이다.

이전 09화 나는 캘거리 택시운전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